남 아프리카 공화국의 바이러스

스위스 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Friedrich Drrenmatt (1921-1990)가 30년전에 집필한 콩트, “남 아프리카 공화국의 바이러스 전염병”이 새로 발굴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스토리 전개가 사뭇 작금의 상황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요약하려다 보니 글이 짧은 데다가 요약하면 맛이 사라질 것 같아서 전문을 옮긴다.


남 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이 코가 막히고 오한이 난다. 다음 날 아침에 잠에서 깼는데 옆의 아내가 재채기를 하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침실에서 뛰쳐나간다. 경찰이 불려 온다. 경찰 역시 콧물이 나고 열에 들떴다. 대통령이 어디 갔냐고 묻는다. 내가 대통령이라고 하자 경찰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그리고 잠옷 차림의 대통령을 연행해 가서 유치장에 던진다. 유치장에는 흑인 한 명이 있었다. 그 흑인이 외치기를 내가 법무부 장관인데 흑인과 같은 유치장에 가두는 것은 인종 분리 법에 저촉된다고 한다.

대통령은 항의하는 흑인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창살을 붙들고 있는 자신의 손을 본다. 손이 검다. 놀라서 다른 흑인을 자세히 본다. 피부색을 제외하고 보니 흑인이 된 백인 법무부 장관이 맞다. 법무부 장관 역시 그 순간에 흑인이 된 백인 대통령을 알아 본다. “우리는 백인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외친다. 그러자 흑인 경찰이 나타나 “조용히 해! 이 검둥이들아!”라고 소리지른다. 흑인 경찰 두 명이 더 나타나 첫 번째 경찰을 두들겨 팬다. 그리고 흑인 경찰이 여기서 뭐하냐고 소리 지른다. 그러다 서로 마주본다. 자신들의 검은 손을 바라본다. 어리둥절해서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을 풀어준다. 그들도 역시 백인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이러스 전염병이 터진 것이다. 백인이 바이러스에 전염되어 흑인으로 변한다. 흑인이 된 백인은 바깥 출입을 하지 못한다. 여인들은 쇼핑도 못하고 미용실에도 못 간다. 남자들은 출근을 못한다. 경찰과 군대가 서로 싸운다. 아직 백인으로 남아 있는 경찰과 군인은 흑인으로 변한 백인 경찰과 군인을 총으로 쏜다. 흑인이 백인의 무기를 뺏은 것이라 생각한다. 흑인이 된 백인은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없기에 쏜다.

수 천 명이 사망한다. 수많은 흑인들이 흑인이 된 백인이 원래 흑인인 줄 알고 편을 든다. 백인이 우세한 듯하지만 백인이 자꾸 줄어든다. 백인이 계속 흑인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백인들 사이에서 바이러스가 빠른 속도로 번진다. 콧물이 나고 열이 오르면서 피부가 변한다. 흑인이 된 백인은 원래 흑인과 구분이 되지 않고 원래 흑인은 흑인이 된 백인과 구분되지 않는다. 격렬한 전투 끝에 도시에 죽은 듯 정적이 온다. 남 아프리카 공화국은 마비된다. 대통령은 몇 주 뒤에 비로소 충격에서 벗어난다. 내각회의를연다. 오직 유럽 출장에서 방금 돌아 온 재무부 장관 만이 아직 흑인으로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오한에 떨면서 쓰러진다. 회의가 다음 날로 연기된다. 재무부 장관도 흑인이 된다.

내각은 인종분리 원칙의 고수를 만장일치로 결의한다.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와 연설한다. “존경하는 백인 여러분! 나도 여러분도 몹쓸 바이러스 때문에 모두 흑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백인입니다. 백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백인으로 남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흑인이 되었더라도 싸워야 합니다. 백인 여러분! 싸웁시다! 백인으로 남읍시다! 인종분리 만세!” 위원회가 구성된다. 흑인이 된 백인을 원래 흑인으로부터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이러스는 백인을 검게만 만든 것이 아니라 특히 못 생긴 흑인으로 만든다.

못 생긴 흑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묵과할 수는 없다. 앞으로 흑인이 된 백인은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백인”이라고 써서 목에 걸고 다니자. 원래 흑인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흑인”이라고 써서 목에 걸고.

에나멜 판으로 목에 걸 이름표를 생산하다가 중단한다. <인종분리에 관한 심리 상담 센터>에서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흑인이 된 백인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를, 본래 검은 흑인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름표를 분배했다가 다시 거두어 들인다. 색깔이 뭔가 암시적이기 때문이다. 흑인이 된 백인은 본래 흑인으로 여겨지고 원래 흑인은 흑인이 된 백인으로 여겨진다. 위원회는 이제 흑인이 된 백인은 흰 바탕에 금색으로 백인이라 쓰고 본래 흑인은 검은 바탕에 붉은 색으로 흑인이라 쓰기로 한다.

스위스 은행 대표단이 온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인종 분리에 반대하지만 사업 상 남 아프리카 공화국과 깊이 얽혀 있다. 그들은, “남 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문제는 오로지 백인만이 해결할 수 있다, 스위스가 남 아프리카 공화국의 재정에 깊이 관여하면 할 수록 흑인의 권리가 커질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남 아프리카에 왔는데 은행에 가 보니 은행장이 모두 흑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백인이라고 주장한다. 스위스 대표단은 믿지 않는다. 어디에도 백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2천 4백만의 흑인이 봉기하여 4백 5십만 명의 백인을 모두 죽였다고 믿는다.

그들은 재채기를 하며 열에 들떠 스위스 에어라인을 타고 바삐 귀국한다. 스위스 공항에 도착하니 그들도 모두 흑인으로 변해 있다. 여권 심사에서 정체를 의심 받는다. 난민 수용소로 보내진다. 거기서 남 아프리카 공화국에 다녀 온 금융 사절단임이 밝혀지자 병원으로 옮긴다. 이제 사람들은 그들을 취리히의 놈(gnome) 대신 취리히의 검둥이neger라고 부른다.

한편 남 아프리카에선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스위스 은행에서 투자금을 모두 회수하려 든다. 에나멜 이름표 암거래가 극성을 부린다. 인종 분리에 반대하는 흑인이 된 백인은 검은 바탕에 붉은 글씨로 흑인이라 쓴 이름표를 사고 본래 흑인이면서 인종 분리에 반대하던 흑인은 흰 바탕에 금색으로 백인이라 쓴 이름표를 사려 한다. 가짜 이름표가 나돌고 그러다보니 이제 뭐가 뭔지 뒤죽박죽이 된다. 결국 인종 분리를 절대 지지하던 백인 (흑인이 된)들 사이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진다. 서로 본래 흑인이면서 흑인이 된 백인인 척 한다고 여긴다.

위원회는 해체된다. 대통령은 인종 분리를 철두철미하게 밀어붙이기로 결정한다. 이제부터는 흑인이 된 백인은 모두 의사가 서명한 진단서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 의사들은 진단서를 미처 다 발급하지 못하거나 급행료를 받는다. 곧 진단서 상으로 흑인이 된 백인이 원래 흑인보다 더 많아진다. 그러나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는다. 앞으로 흑인이 된 백인은 본래 흑인과 함께 출두하여 증언을 받아야 한다.

이 조치는 엄청난 부작용을 낳는다. 흑인이 된 백인은 본래 흑인이 같이 다녀야 한다. 흑인이 된 백인 남성이 흑인이 된 백인 여성과 결혼하려면 결혼식 장에 각각 본래 흑인을 한 명씩 데리고 와서 증언을 받아야 한다. 음식점에서도 흑인이 된 백인이 음식을 먹으려면 원래 흑인 한 명이 같이 가서 그가 흑인이 된 백인임을 증언해야 한다. 음식점이 미어 터진다. 흑인이 된 백인 중에는 본래 흑인으로부터 증언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도 많다. 그 대신 흑인이 된 백인이 증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래 흑인들이 본래 흑인 한 명을 증인으로 데리고 가서 본래 백인이었다고 증명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다보니 원래 흑인이 백인 사회에 점점 더 깊이 침투한다. 그러다 그 사이에서 백인 아이들이 태어난다. 대통령은 다시 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사하라고 지시한다. 흑인이 된 백인과 본래 흑인 사이에서 백인 아이들이 태어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로 흑인이 된 백인과 본래 흑인의 혼인이 잦아진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들의 반만 백인인데 이 아이들은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없다. 그래서 다시 흑인이 된다.

대통령은 오로지 흑인이 된 백인으로만 구성된 위원회를 – 위원회의 반은 본래 흑인이라는 소문이 떠돌지만 – 종용하여 마지막으로 인종 분리를 관철하여 한다. 다시 텔레비전에 나와서 연설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모두 흑인입니다. 흑인이 된 백인, 또는 원래 흑인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흑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인종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요소가 나타났습니다. 우리처럼 흑인이 된 백인이 아니라 백인이 된 흑인이 문제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 때 본래 흑인에게 적용했던 인종 분리 법을 계속 적용할 것입니다. 남 아프리카 흑인 만세!”

대통령의 연설에 사회가 크게 동요한다. 결국 폭동이 일어난다. 백인으로 태어나 흑인이 된 아이들의 부모와 나머지 국민들이 모두 나섰다. 경찰과 군대도 합세하고 내각도 합세하여 결국 대통령을 몰아 낸다. 대통령은 앙골라로 도망간다.

인종 분리의 종말이 이렇게 왔다. 이는 어느 스위스의 은행가가 내게 들려준 얘기다. 그는 매우 검다. 흰색 양복을 입고 알록달록한 넥타이를 매고 있다. 어깨 위의 라디오에서 재즈 음악이 흘러 나온다. 그는 내 주변을 맴돌며 흔들흔들 춤을 춘다. 환하게 웃는다. 취리히 은행가들에게서 볼 수 없는 삶에 대한 즐거움이 가득하다. 그에게 들은 대로 보고서를 쓰고 나니 갑자기 재채기가 나고 오한이 난다.


출처: DAS MAGAZIN N25 – 20. Juni 2020

© 고정희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