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드 베리 공작과 그의 기도서

글: 고정희

장 드 베리(Jean de Valois, duc de Berry 1340-1416)는 프랑스의 왕자였다. 왕이 되지 못한 왕자였다. 그래서 비극이 시작되었다면 흥미로운 얘기거리가 될 터인데 그는 잘 먹고 잘 살다가 갔다. 다만 갈 때는 썩 좋지 않았다. 페스트에 걸려 사망했으니. 그는 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되지 못했다. 장 2세의 아들, 샤를5세의 동생, 필리프2세의 형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왕자라 하지 않고 공작이라 하는 이유는 유럽의 복잡한 신분제도 때문인데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왕자 Prince라 불리는 것은 아니고 성년이 되어 공식적으로 작위를 받아야 한다. 베리왕자의 경우 만 16세에 공작의 작위를 받고 여러 영지를 물려받아 통치하기 시작했다.

베리 공작의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그가 남긴 유명한 필사본 기도서 때문이다. 그가 필사한 것이 아니라 필사를 의뢰하여 만든 기도서가 있는데, 그것이 전해져 내려오는 중세 필사본 중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이 났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과도기 작품이어서인지 그림이 매우 세련되고 파란색이 주를 이루는 삽화 색상이 무척이나 선명하여 눈길을 끌 수 밖에 없다.

이십 여년 전인었던 것 같다. 우연히 어느 서점 판매대에서 그 기도서의 복사판을 보고 너무 아름다워서 뭐 하는 책인지도 모르는 채 구입했었다. 그림 때문에 산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책이 있다니 그리고 그것도 이리 저렴하게 팔다니. 그러면서 후딱 사가지고 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기도서 자체의 복사본이 아니고 그 책에 관한 설명서였다. 그럼 그렇지. 그러나 설명서라서 읽을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그리고 많은 삽화가 들어 있어 충분했다. 원본은 죄다 중세 라틴어로 되어 있어 어차피 해독 불가.

원본의 복사본은 별도로 주문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약 3,000 유로에서 7,000 유로 사이. 나중에 알고 보니… .

(책 사진을 클릭하면 책 소개 영상으로 연결되어 자세히 볼 수 있음.)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혹은 시대를 잘못 골라서 태어났더라면, – 예를 들어 우야만 왕조의 압둘-알-라만 왕자처럼 -,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거나 큰 시련을 겪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베리 공작의 삶은 큰 굴곡없이 평온했던 것처럼 보인다. 만 20세에 볼모왕자가 되어 영국에 갔다가 7년 뒤에 풀려난 것이 유일한 모험이랄까?

Jean Duc de Berry (1340~1416). 기도서 1월력에 실린 모습. ©Photo. R.M.N. / R.-G. OjŽda

1380년 형 샤를5세가 서거한 뒤 그의 형과 동생, 앙주공작, 필립공작과 함께 어린 조카 샤를르 5세의 섭정을 맡았다. 이때 장 드 베리 공작은 랑게독의 지휘관이 되었으나 백성들에게 혹독하여 조카의 미움을 샀다. 조카가 성년이 되어 샤를6세로 등극한 뒤 베리공작의 지휘권을 박탈했다. 후일 샤를6세가 정신병에 걸리자 다시 형제들과 함께 섭정했으나 큰 권력은 잡지 못한다. 1413년까지 전쟁에 여러 번 참전하고 다시 랑게독의 집정관을 맡았다.

그러나 예술과 건축에 더 관심이 많아서 성을 17채나 짓고 많은 필사본의뢰

왕자로서 정치적, 군사적 경력을 쌓는 것이 당연하였으므로 하기는 했지만 그 보다는 예술과 건축에 관심이 더 많았다. 특히 책을 좋아하여 수많은 필사본을 만들게 했다. 기도서 필사본도 여러권 만들었으나 그중 Très Riches Heures(매우 호화로운 기도서)가 가장 널리 알려졌다. 이 기도서는 베리공작의 소장도서 중에서뿐 아니라 프랑스 중세 필사본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1410년 Limburg 화가 삼형제에게 제작을 의뢰했다. 공작은 이 기도서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416년 페스트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Limburg 삼형제도 역병에 걸려 기도서를 완벽하게 끝내지 못한 채 모두 사망했다.

그후 1440년경부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화가가 기도서 제작을 넘겨받아 계속 작업했는데 이 화가가 다름아닌 바르텔레미 데이크Barthélemy d’Eyck라는 주장도 있다. 기도서가 완전히 마무리된 것은 1489년으로서 공작의 후손, 사보이 가문의 샤를1세가 장 콜롱브에게 의뢰하여 작업을 마치게 했다.

베리공작이 지은 성과 궁이 도합 17채로(!) 알려졌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많지 않다. 중요한 성은 그의 달력에 모두 묘사되어 있다.

이 기도서는 예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므로 이에 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내가 구입한 책이 바로 그 연구서 중 하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

달력

그 자체로도 좋지만 기도서이면서 동시에 농사월력처럼 구성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

책 서두에 우선 열두달 달력을 만들어 넣은 것이다. 마치 지금의 플래너처럼. 다른 점은 달력이 모두 그림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이 그림 달력이 내겐 가장 중요하다. 당시 농사짓던 모습과 정원가꾸던 모습도 조금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긴 중세 영주들에게 농사는 큰 관심거리였다. 앞으로 매월 그달의 달력 그림을 소개할 까 한다.

우선 1월부터.

1월력 부분. 신년하례식 장면. 파란 옷을 입은 이가 베리 공작. ©Photo. R.M.N. / R.-G. OjŽda

© 3.SPACE MAGAZINE/MIXED/책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