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정희
얼마 전, 독일자연보호연맹에서 올해의 새를 선발하려 하니 투표하라는 이메일이 왔다. 후보 중에 붉은가슴새가 끼어 있기에 아무 망설임없이 한 표 던졌다. 나중에 결과를 보니 붉은가슴새가 당당하게 당선되어 올해의 새가 되었다!
지난 성탄절에 성탄절 이야기를 읽다가 우연히 붉은가슴새의 전설에 접하게 되었다. 스웨덴의 여류작가 셀마 라겔뢰프가 쓴 이야기인데 그걸 읽은 뒤 붉은가슴새의 펜이 되었다.
붉은가슴새는 국내에서 유럽울새라고 알려진 듯하다. 그러나 영어권의 이름 로빈 Robin redbreast을 따라 내맘대로 붉은가슴새라 부르고 있다. 크리스마스 카드에 자주 등장하는 겨울새다. 산타할아버지처럼 성탄절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새인데 셀마 라겔뢰프가 전하는 전설은 성탄절 얘기라기 보다는 오히려 부활절과 관련된 얘기라서 부활절이 되기를 기다렸다. 엊그제가 부활절이었는데 분주하여 올리지 못하고 이제야 소개한다.
붉은가슴새의 가슴이 왜 붉은지 알아?
셀마 라겔뢰프 지음
고정희 옮김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식물과 동물을 만들고 차례로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와 관련한 일화가 많은데 그 일화를 다 알게 된다면 아마도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어느 날, 조물주가 파라다이스에 앉아 새들에게 색을 입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물감이 다 떨어졌을 때 오색방울새의 깃털에 붓을 씻지 않았다면 오색방울새는 색깔 없는 새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날 나귀의 귀가 길어졌는데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나귀는 몇 걸음 못 가서 자기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 세 번이나 그랬습니다. 그때마다 조물주에게 되돌아가 “제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라고 묻자 세 번째 드디어 신의 인내심이 바닥이 났습니다. 그래서 나귀의 귀를 힘껏 잡아당기며 “네 이름은 나귀다. 나귀, 나귀, 나귀!”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귀의 귀가 길어진 겁니다. 말귀 좀 제대로 알아듣고 잘 기억하라는 뜻이었죠.
그날 벌이 벌을 받는 일도 생겼습니다. 벌은 창조되자마자 부지런히 꿀을 모았습니다. 사람과 동물들이 모두 꿀 향기에 취해 모여들어 맛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벌은 꿀을 나눠주지 않으려고 벌집에 가까이 오기만 하면 독침을 날렸습니다. 조물주가 이를 보고 역정을 냈습니다. “네게 달콤한 꿀을 모으는 재주를 주었을 때는 못되게 굴 권리도 준 건 아니란다. 이제부터 너는 침을 쏘고 나서 죽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날 귀뚜라미는 눈빛을 잃고 개미는 날개를 잃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조물주는 종일 생명을 만들고 숨을 불어넣다가 저녁이 되자 무슨 생각에서인지 작은 잿빛 새를 한 마리 만들었습니다. 그 작은 새를 손바닥에 앉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이름은 붉은가슴새란다. 기억하거라.” 그리고 날려 보냈습니다.
작은 새가 하늘을 날아가다가 땅을 내려다보니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그렇게 아름다운지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자기 몸이 잿빛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름은 붉은가슴새인데 가슴도 잿빛이었습니다. 새는 이리저리 몸을 돌리며 연못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으나 붉은 깃털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새는 창조주께 다시 날아갔습니다. 창조주는 너그러운 모습으로 옥좌에 높이 앉아 있었습니다. 손에서 오색나비들이 나타나 창조주의 머리 곁을 빙빙 돌았습니다. 신의 어깨에는 비둘기가 앉아 구구 노래하고 있었고 장미, 백합, 데이지가 그 주위에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새의 작은 가슴이 두려움에 콩닥거렸습니다. 그러나 용감하게 곡선을 그리며 창조주께 다가가 그의 손에 내려앉았습니다.
창조주는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새가 대답했습니다.
“여쭤볼 것이 있어요.”
“뭔가 알고 싶은 게 있니?”
“제가 왜 붉은가슴샌가요. 부리부터 꽁지까지 모두 회색이거든요? 붉은 깃털이 단 하나도 없는데 왜 붉은가슴새라고 하셨어요?”
새는 검고 큰 눈으로 애원하듯 바라보다가 눈을 돌려 이곳저곳 두리번거렸습니다. 꿩이 보였습니다. 빨간 깃털에 금빛 무늬가 화려했습니다. 목이 빨간 앵무새도 보였습니다. 닭의 붉은 벼슬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오색나비와 금붕어와 장미도 보였습니다.
아주 조금만, 아니 단 한 방울이라도 좋으니 빨간색이 가슴을 물들인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내 이름에 꼭 어울릴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회색인데 왜 붉은가슴새라고 하셨어요?” 새는 이렇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내가 깜빡했구나. 잠시만, 내가 얼른 고쳐줄게.” 이렇게 말할 것을 기대했죠.
그러나 창조주는 그저 인자하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래 내가 너를 붉은가슴새라고 불렀지. 넌 앞으로도 그리 불릴 것이다. 다만 네 가슴의 붉은색은 네가 스스로 얻어야 한다.” 그러시고는 옥좌에서 일어나 새를 다시 세상에 날려 보냈습니다.
새는 깊은 생각에 잠겨 파라다이스를 날아다녔습니다. 나같이 작은 새가 대체 뭐를 어떻게 해서 붉은 깃털을 얻는단 말인가?
그러다 생각한 것이 가시나무에 둥지를 트는 거였습니다. 작은 새는 가시덤불에 내려앉아 둥지를 틀었습니다. 장미 가시에 가슴이 찔린다면 붉어지지 않을까 기대했던 거죠. 그러나 가슴은 붉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시간이 평화롭게 흐르고 또 흘렀습니다. 언제부턴가 사람과 동물은 모두 파라다이스를 떠나 지구에 퍼져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땅을 일궈 먹을 것을 얻기 시작했고 바다를 항해했습니다. 옷을 만들고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신전을 짓고 로마, 예루살렘 같은 거대한 도시를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날 아침 붉은가슴새 어미는 예루살렘 언덕의 담장 위에 앉아 새끼들에게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새끼들은 담장 아래 장미 덩굴 속의 둥지에서 편안히 쉬고 있었죠. 어미새는 새끼들에게 창조의 날, 이름을 받던 날의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붉은가슴새들은 새끼들에게 대대로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어떻게 창조주의 뜻을 받았는지, 어떻게 신의 손에서 태어났는지를.
“그로부터 수많은 세월이 흘렀구나. 장미가 수없이 피고 또 졌지. 수없이 많은 새가 알을 깨고 나왔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셀 수도 없단다. 그러나 우리 붉은가슴새들은 아직도 잿빛을 면하지 못하고 있단다. 아직 붉은 깃털을 어떻게 얻는지 그 방법을 찾지 못했어.”
새끼들이 작은 부리를 있는 대로 열고 짹짹거리며 물었습니다. 조상들이 왜 애를 쓰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붉은 깃털을 얻기 뭔가 영웅담을 만들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물었습니다.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만큼 힘껏 노력했어. 최초의 선조께서 짝을 만나셨을 때의 일이었단다. 가슴이 열정에 불타올랐지. 그때 이렇게 생각하셨어. 아, 이건가? 이렇게 끓어오르는 사랑을 느껴야 가슴이 붉어지는 건가? 그러나 얘들아 실패했단다. 가슴 깃털이 붉어지지 않았어. 그 이후에도 또 이후에도 지금까지도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어.”
어린 새끼들이 슬픈 듯 어지럽게 지저귀기 시작했습니다. 아~ 우리도 영영 붉은 깃털을 얻지 못하고 말 건가?
“노래에 승부를 걸자! 이렇게도 생각했었지.” 그러면서 아빠 새가 길고 처량하게 음률을 뽑았습니다.
“노래를 엄청나게 잘하셨던 조상님이 계셨던 거 아니? 그래서 희망을 품으셨었지. 아, 내 영혼을 바쳐 불타듯 노래하면 붉게 물들지 않을까?”
그런데 아무리 열정적으로 노래해도 가슴은 붉어지지 않았어. 그 이후에도 그랬고 너희들도 그럴 것이란다.“
새끼들이 흥분하여 또다시 시끄럽게 지저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용기와 용맹함에 기대를 걸어보기도 했어. 첫 선조께서 아주 용감하셨거든. 싸움할 때면 가슴이 부풀다 못 해 불타셨지. 내 마음속에 있는 승리에 대한 욕망이 내 가슴을 붉게 물들이리라. 그러나 그러지 못했어.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도. 그리고 너희들도 그러지 못할 것이란다.“
새끼들이 다시 흥분해서 재잘거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외쳤습니다. 그러나 어미새는 어두운 음성으로 그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우리 훌륭한 선조들이 이루지 못한 것을 너희들이 과연 할 수 있겠니? 사랑하고, 노래하고, 싸우는 것 외에 또 무엇을 더 할 수 있…. . ?
어미새는 말을 마치지 못했습니다. 그때 마침 예루살렘 성문에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나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새가 앉아 있는 언덕 쪽으로 몰려왔습니다.
말을 높다랗게 탄 기사들과 번쩍이는 창을 치켜든 병사들이 따랐습니다. 노비들이 못과 망치를 들고 따랐습니다. 제사장과 판관이 엄숙하게 걸었습니다. 여인들이 울면서 따랐습니다. 거친 부랑배들이 고함을 지르며 따랐습니다.
여태 담장에 앉아 있던 어미새는 가슴이 두근거려 둥지 가장자리에 내려앉았습니다. 둥지가 있는 장미 덤불을 사람들이 짓밟고 갈 것 같았습니다. 새끼들이 밟힐까 봐 두려웠습니다.
”얘들아, 조심해! 서로 바짝 붙어있어라. 아무 소리도 내면 안 돼! 저기 말이 달려온다. 말이 우리 머리 위로 지나갈지도 몰라! 앗! 저기 달려오는 병사들 신에 못이 박혔네. 밟히면 죽는다. 성난 무리가 흥분해서 몰려오고 있어!“
그러다 어미새는 문득 소리를 멈췄습니다. 닥쳐오는 위험도 갑자기 잊었습니다. 그리고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감쌌습니다.
”저건 너무 끔찍하다. 너희들 보면 안 된다. 세 명의 범죄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구나.“
어미새는 새끼들이 보지 못하도록 날개를 더 활짝 벌리고 눈을 가렸습니다. 망치소리와 고통스런 신음소리, 군중의 흥분한 함성만이 들려왔습니다.
어미새는 그 끔찍한 장면을 모두 보았습니다. 너무 끔찍하여 꼼짝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세 명의 죄수로부터 눈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들이 어찌 저리 잔인할까! “ 한참 후 정신을 차린 뒤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저 불쌍한 죄수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도 모자라 한 사람에겐 가시로 만든 관을 씌웠구나. 가시가 이마를 찔러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여기서도 똑똑히 보여. 그런데 가시면류관을 쓴 저 사람은 너무 아름답구나. 나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아. 저 사람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저 사람이 저렇게 고통받는 것을 보니 내 심장에 칼이 꽂히는 것 같애.”
어미새의 가슴 속에 가시면류관을 쓴 사람에 대한 연민이 점점 커졌습니다.
“내가 독수리라면, 저기 손에 박힌 못을 내 부리로 뽑아버릴 텐데.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 저 소리지르는 무지한 군중을 쫓아버릴 텐데.”
붉은가슴새는 그 사람의 이마 위로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며 더는 둥지에 앉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비록 작고 약하지만, 뭐라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는 십자가가 서 있는 언덕으로 힘껏 날아갔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쓴 사람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처음에는 크게 원을 그리며 감히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붉은가슴새는 원래 아주 수줍은 성격이었습니다. 평소에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죠. 그러나 점차 용기가 생겼습니다. 십자가로 날아가 작은 부리로 그의 이마에 박힌 가시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피가 한 방울 새의 가슴에 떨어졌습니다. 피는 금방 번져 새의 작은 가슴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 사람이 입을 열어 새에게 속삭였습니다. “너의 연민이 그동안 너의 조상들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게 했구나.”
다시 둥지로 돌아가니 새끼들이 짹짹거리며 야단이 났습니다. “엄마, 가슴이 붉어졌어. 장미보다 더 붉어!”
“이건 말이다. 저 가여운 사람의 이마에서 묻은 피란다. 개울에 가서 씻으면 곧 사라질 거야.”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씻어도 붉은색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새끼들이 자라자 그들의 가슴도 붉어졌습니다. 그날 이후 붉은가슴새의 가슴깃털은 붉게 빛나게 되었습니다.
끝
© 써드스페이스 매거진/고정희 컬럼/붉은가슴새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