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에 상인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시종을 불러 장에 다녀오라고 시켰다. 장으로 간 시종은 붐비는 인파 속에서 낯선 여인을 보았다. 순간 시종은 그 여인이 죽음Death임을 알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여인이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놀란 시종은 심부름도 잊고 집으로 달려갔다. “주인님, 장에서 죽음을 보았습니다. 도망치려 합니다. 말을 빌려주세요.” 주인은 말을 내주었다. 시종은 말을 타고 미친 듯 사마라로 달렸다.
시종도 잃고 말도 잃은 상인은 화가 나서 장으로 갔다. 거기 여인의 형상을 한 죽음이 아직도 있었다. 상인은 여인에게 다가가 따졌다. “왜 내 시종을 놀래킵니까? 심부름도 잊고 사마라로 도망갔잖아요.” 죽음이 말했다. “놀래키려 한 것이 아니야. 내가 더 놀랬는 걸. 그가 왜 바그다드에 있었지? 실은 그와 오늘 저녁 사마라에서 약속이 있거든.”
오리엔트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서머셋 모옴이 1933년 단편으로 써서 세상에 알렸고 이듬해 미국 작가 존 오하라가 <사마라에서의 약속Appointment in Samarra>이라는 제목으로 장편 소설을 썼다. 몇 년 뒤에는 아가사 크리스티가 <죽음과의 약속Appointment with Death>이라는 제목으로 추리 소설을 썼다. 물론 스토리는 전혀 다르다. 약속된 죽음이라는 테마만 따 왔을 뿐. 이 이야기는 또 2008년 영국 드라마 시리즈 <아가사 크리스티의 포와로>에서 방영했다(S11/E4).
사마라에서 찾는 초기 이슬람 정원의 흔적
사마라가 어떤 곳이기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사마라는 지금의 이라크에 있는 도시인데 9세기에 잠시 동안 아랍 제국의 수도였다. 바그다드 북쪽으로 약 120km 떨어져 있다. 본래는 고대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건설했으며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큰 도시에 속했었다. 페르시아의 멸망과 함께 사마라도 사막에 버려진 채 스러져가고 있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750년에 우마얀 왕조가 무너지고 아바스 왕조가 들어섰다. 아바스 왕조는 거점을 시리아에서 이라크로 옮겼다. 새로이 수도를 건설하고 이를 바그다드라 불렀다.
그런데 백 년도 되지 않은 833년, 칼리프 알-무으타심al-Muʿtasim은 사마라 폐허 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바그다드를 떠나 천도한다. 사마라는 892년 그의 후손이 수도를 다시 바그다드로 옮기기까지 불과 50년 정도 존속했다. 다만 이 시기에 아바스 왕조는 제국으로서의 기틀을 확립하게 되고 사마라는 전설이 되어 갔다. 사마라에 가면 죽는다는 전설이 이때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당시 사마라는 티그리스 강을 따라 약 50km 가량 길게 늘어선 형상으로 건설되었다(지도 참조). 마치 서울의 강남처럼 엄청난 속도로 지었고 빨리 번성했다. 지금은 극히 일부 구역에서만 사람들이 살고 있다.
아랍 제국 최초의 고도 다마스쿠스가 아니라 하필 이런 유적지에서 이슬람 정원의 흔적을 찾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다마스쿠스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존속해 온 대도시로서 온갖 문명과 시대와 문화의 흔적이 겹겹이 포개져 있는 도시이다. 그 때문에 이슬람 정원이 여기서 시작되었을 것임에도 그 자취를 찾기 어렵다. 반면 사마라는 건설된 지 반세기 만에 다시 사라져 천 년의 세월을 모래 속에 파묻혀 있었다. 1911-1913년 사이에 독일 고고학자 에른스트 헤르츠펠트 박사가 발굴하여 세상에 다시 알릴 때까지. 화산재에 묻힌 폼페이에 고대 로마의 문화가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헤르츠펠트 박사의 삽질에 따라 남쪽의 발쿠바라 궁전Balkuwara, 중앙의 칼리프 궁전Palace of the Caliph, 대 모스크Abu Dulaf Mosque, 가장 북쪽의 사막 궁전(Qasr al-Ja’fari) 등의 유적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래 조감도는 박사가 손수 그린 사마라 발쿠바라 궁전 복원도이다. 발쿠바라 궁전은 황태자 궁이었다. 왼쪽 아래 야자 나무 두 그루가 보이는 곳이 티그리스 강 쪽이다.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쳐서 커다란 중정이 보인다.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중앙에 연못이 있다. 드디어 이슬람 정원의 흔적을 찾은 것이다.
그 아래의 도면 역시 헤르츠펠트 박사가 그린 것인데 이런 식의 사분원이 여러 개 연속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사분원은 페르시아에서 출발한 것으로 본다. 아랍인들이 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을 정복했을 때 이런 정원을 보았을 것이다. 아라비아 사막에서 살았던 초기 무슬림들에게 페르시아의 거대한 궁전과 정원은 매우 신기했을 것이다. 후일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제국을 건설하며 자신들의 도시와 궁전, 모스크와 정원을 지을 대 페르시아의 유산을 물려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코란에서 약속한 파라다이스
사막에서의 삶에 물이 중요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코란에서도 내세에 <마르지 않고 흐르는 샘물>>을 약속했다. 그러므로 연못이 중앙에 배치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도면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연못의 사방에 수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이 역시 코란에서 묘사한 파라다이스 정원 형상과 맞아 떨어진다.
신을 두려워 하는 자에게는 백화가 만발한 두 개의 정원이 주어질 것이다. 신이 그대들에게 내리는 이 축복을 부정할 수 있는가?
정원마다 샘물이 솟아 흐르고 과일 나무는 모두 한 쌍씩 자라고 있다. 신이 그대들에게 내리는 이 축복을 부정할 수 있는가?
두 개의 정원 바깥에는 또 다시 두 개의 정원이 있어 녹음이 짙으니 신이 그대들에게 내리는 이 축복을 부정할 수 있는가?
두 개의 샘물이 솟아 흐르며 과일과 야자수와 석류나무가 있는 곳…
코란 55/46-54, 62-68. 독일어 본을 필자가 임의로 번역한 것임.
코란에서 묘사한 정원이다. 두 개의 정원이 있고 또 두 개의 정원이 있으며 정원마다 샘물이 솟아올라 다시 흐르고… 과일나무는 한 쌍씩 자라고 있고(아마도 좌우대칭으로) 등등…
이렇게 하여 탄생한 이슬람 정원의 구조는 12세기 그라나다의 헤네랄리페 정원, 15세기 이란 카샨의 핀Bag-e-Fin 정원, 17세기 무굴 제국에서 조성한 파키스탄의 샬리마르 정원, 인도의 타지마할까지 계속 대물림한다. 그 뿐 아니라 지금 새로 짓는 이슬람 정원도 대개는 이와 같은 원칙을 따른다.
그런데 여기서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 인가라는 물음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이슬람 정원의 원형으로 알려진 사분원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엄연히 페르시아 정원에서 출발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코란에 묘사된 파라다이스는 어떻게 된 것인가. 페르시아 인들이 코란을 알았을 리 없으니 거꾸로 페르시아의 정원 모습이 코란에 스며들어 간 것은 아닐까? 물론 무슬림들은 이를 부정하겠지만 코란이 훨씬 뒤에 쓰인 것이니 순서가 그게 맞을 것 같다.





© 고정희의 블로거진/이슬람 정원 기행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