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타워에 슈퍼블룸이 온다
고 정 희
맷 콜린스는 런던 가든뮤지엄의 수석정원사다. 그리고 정원저널리스트다. 4년 전 이른 봄, 그는 박물관 정원의 멀쩡한 잔디밭을 뜯어내고 야생화 혼합종자를 뿌렸다. 봄이 깊어 야생화들이 피기시작하자 방문객들이 좋아했다. 잔디밭 어디갔냐고 불평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앞으로도 계속 봄마다 야생화 씨를 뿌려달라고 했다.
맷 콜린스가 뿌린 씨는 나이젤 더넷 교수가 혼합한 것이다. 나이젤 더넷 교수는 셰필드 대학 조경과에서 식물적용학을 가르친다. 그리고 전문적으로 도시에 꽃씨를 뿌리는 사람이다. 도시민들에게 자연다운 자연을 되돌려 주기 위해 수십 년 동안 고민한 결과, 씨부터 뿌려 자연을 만들어 가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결론에 도달한 듯하다. 도시를 꽃밭으로 만들겠다는 나이젤 더넷의 의지는 이미 전세계 정원인구의 갈채를 받고 있다. 이제는 영국 여왕도 나이젤 교수를 지지한다.
작년 늦가을, 2021년 11월 영국왕실고궁관리소 (Historic Royal Palaces)에서 런던 타워를 꽃으로 둘러싸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장미같은 화려한 꽃이 아니라 야생화, 그것도 일년초로 뒤덮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슈퍼블룸Superbloom” 이라 칭했다.
슈퍼블룸
슈퍼블룸은 원래 미국 캘리포니아 건조한 지대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자연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2017년 캘리포니아 카리조평원의 구릉을 거의 한날 한시에 보라색, 노란색, 오렌지 색의 야생화가 뒤덮으며 마치 기적과 같은 장면을 보여주었다. 2019년 역시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카운티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났다. 산봉우리가 온통 오렌지색 양귀비로 뒤덮힌 것이다.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를 1990년대부터 슈퍼블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침입종이나 그라스 등의 경쟁에 강한 식물에 밀려 원주민이었던 야생화 씨앗들은 땅 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거기서 건조함을 견디며 오랜 세월을 끈기있게 기다렸다. 종자껍질이 매우 두껍거나 아니면 왁스층으로 보호된 야생화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수십 년도 버틸 수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비가 오랫동안 내려 빗물이 지층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면 지층에서 잠자던 야생화 씨앗이 일제히 깨어나게 된다. 그리고 일제히 싹을 낸다. 그런데 이때 너무 큰 비가 내리면 어린 싹이 모두 쓸려내려가고 또 비가 갑자기 그치고 다시 건조해지면 시들어 버린다.
비가 온 뒤 땅이 서서히 더워져야 한다. 구름도 충분히 껴서 낮엔 땅이 너무 뜨겁게 가열되는 것을 막고 밤엔 너무 냉각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또한 싹이 나왔을 때 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좋지 않다. 어린 싹이 바람에 뽑히거나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 하기 때문에 슈퍼블룸은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나이젤 더넷 교수는 2019년 캘리포니아에서 순회강연을 할 때 우연히 슈퍼블룸을 목격했다. 그것만으로도 전율이 나는데 수십만명의 관광객이 몰려들어 너무 즐거워하며 꽃으로 목욕을 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그도 재현하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자연의 신비를 느끼게 하고 싶다는 것이 늘 그의 고민거리였기 때문이다.
런던으로 돌아간 그는 왕실고궁관리소 책임자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슈퍼블룸이 수십 년에 한번씩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여왕 즉위 70주년도 그와 같지 않은가라는 설명으로 설득했다. 정말 드물고, 정말 특별하고, 되풀이되지 않는 일. 슈퍼블룸과 영국여왕의 긴 즉위 기간은 이렇게 서로 닮은 점이 있다.
올봄 나이젤 교수는 런던탑 주변의 물마른 해자에 수백만 개의 꽃씨를 뿌렸다. 아직은 별로 보이는 것이 없지만 6월 1일 개장할 때는 꽃이 가득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9월까지 수시로 변화하는 색과 향의 스팩터클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당국에서는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꽃으로 채워 자연의 스펙터클한 아름다움뿐 아니라 와일드라이프가 가능한 새로운 서식처를 창조하고자 한다” 고 발표했다. 자연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를 어린 백성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뜻이다.
런던타워의 해자는 이미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대에 물을 빼고 목초지로 만들었다. 거기서 가축이 한가롭게 풀을 뜯었고 2차 대전 때는 채소를 길렀다.
1977년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20주년에 처음으로 이곳에 정원을 만들어 기념했다. 다만 첼시플라워쇼처럼 일회용 정원이었다. 이제 반세기가 지나 다시 정원이 되려 한다. 일년생 풀꽃의 종자를 뿌리기 때문에 이 역시 일회성이지만 해마다 쉽게 반복할 수 있다. 최소의 인풋으로 최대의 아웃풋을 얻는 것 역시 나이젤 교수가 즐겨 말하는 키워드이다.
13세기 처음에 런던타워를 축조할 때는 해자를 뚫어 백성들의 접근을 막았지만 이제는 해다마 새로운 꽃밭을 만들어 백성들을 즐겁게 하겠단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공짜가 없다는 것. 성인 일인 당 약 2만원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