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적용학 연구록

형태는 생명을 따른다

글: 오세훈(정원・식재디자인 스튜디오 ‘이듬해’ 대표)

지극히 개인적이고 단편적인 글이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지식을 자신 있게 전달하기엔 연구 기간과 경험이 짧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을 써내려가는 건 식물적용학을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간 연구해왔던 소회를 함께 공부하는 이들 또는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서다.

발아

정원디자이너로서 나의 경력은 2018년 서울정원박람회에서 시작된다. 바로 그 전년에 아우돌프의 루리 가든을 직접 보고 여러해살이풀이 지닌 부드러운 힘을 깨달은 뒤였다. 공모전을 임하는 내 목적은 분명했다. 식물이 주인공인 정원을 만들자고. 구조물을 위한 배경용 스윙재즈가 아닌 찰리 파커의 비밥 같은 그런 스타일로 말이다(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었다). 정원 면적의 80% 정도를 여백 없는 식재 공간으로 구성하고 여러 농장에서 공수해온 식물들을 색에 맞춰서 심었다. 작은 포트 식물이라 초기 효과를 위해 빽빽하게 심었는데 ‘그 때 시점’에서는 그리 지나치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듬해에 상황은 달라졌다. 일 년 묵은 식물들은 급속도로 성장했고 너무 밀도가 높았던지라 여러 식물들의 잎과 줄기가 뒤엉켜져 자연의 무질서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곳곳에 들어선 잡초들은 덤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보라색 꽃이 아담하니 좋았던 뉴잉글랜드아스터는 무서울 정도로 높이 자라 자신의 몸을 겨누지 못해 넘어지기 일쑤였다. 공공공간에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정원을 만든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픔 속에 식물적용학의 씨앗이 발아했는지도 모르겠다.

신대륙

2019년, 아우돌프 같은 멋진 디자이너가 되는 것을 목표로 다니던 조경 회사를 그만두고 아우돌프가 쓴 책을 번역하고 있었을 때였다. 늘 즐겨 보던 한국조경신문 홈페이지에서 고정희 박사님이 쓴 <어느 대학생의 활약 – 식물적용학에 대하여>란 기사를 발견하고 주의 깊게 읽었다. “초기 투자비용이 적게 들고 관리가 용이하면서도 오래 그 모습을 간직할 수 있는 기법”이라는 부분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직감적으로 이 식물적용학이라는 낯선 개념에 뭔가 대단한 것이 담겨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검색을 했지만 한글이나 영어로는 관련 정보들이 잘 나오지 않았다. 너무 궁금했던지라 당시 일면식도 없던 박사님께 다짜고짜 메일을 보내 검색해도 자료가 잘 안 나오는데 좀 알려주실 수 없냐며 이것저것 여쭤 봤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실례를 무릅쓰고 보냈던 메일 몇 통이 2021년 식물적용학 강좌 개설에 작은 단초가 됐다는 내용의 뉴스레터를 나중에 받았다. 그간 식물적용학을 홀로 연구하고 있던 내게는 너무도 반가운 일이었다. 이 강의는 내게 또 다른 영감이 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식물로 디자인한다는 것은 단순히 색과 형태로만 이루어진 조합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이전에 식물이라는 살아있는 생명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형태는 생명을 따른다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말과 함께 건축 분야에 모더니즘을 가져왔다. 모더니즘은 외형적으로 단순한 형태와 간결한 구성이 특징이나 그 이면에는 당대의 시대적 요구가 담겨 있다. 시카고에서는 대화재가 발생했고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인한 사회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도시와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전통 방식에 벗어난 보다 경제적이고 기능적이며 미적인 ‘새로운’ 건축 방식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독일 리하르트 한젠Richard Hansen 교수가 1981년에 펴낸 저서, 숙근초와 그들의 서식처 표지. 출처: 고정희

흥미롭게도 정원과 식재의 모습은 그와는 정반대로 변화해왔다. 일찍이 데카르트의 기계적 자연관과 루이 14세의 과시욕이 뒤섞여 17세기에 베르사유 정원이라는 거대하고 기하학적인 녹색 덩어리가 만들어졌다. 정형식 정원을 답습하던 영국에서는 18세기에 자연풍경식 정원이 제시되었지만 이 역시도 곡선 산책로, 너른 잔디밭, 호수 등 철저한 회화적 연출에 의한 간결한 구성이 특징이었다. 나무와 풀 같은 생명이 있는 정원 요소들은 여전히 미적 오브제에 지나지 않았다.

정원 분야에서 실로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했던 건 윌리엄 로빈슨의 <야생정원(The Wild Garden, 1870)>이었다. 시즌마다 매번 갈아줘야 하는 계절화단에 의문을 가졌던 로빈슨은 “추가적인 돌봄이나 비용 없이도 잘 자랄 수 있는 입지에 강인한 여러해살이풀을 심는” 야생정원을 제시했다. 하나의 ‘생명’으로서 여러해살이풀의 자생성에 주목했던 것이다. 로빈슨의 통찰은 거트루드 지킬과 칼 푀르스터 등 많은 정원사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칼 푀르스터의 제자였던 리하르트 한젠은 로빈슨의 과업을 이어 받아 여러해살이풀의 생육 방식, 서식처 조건, 사회성 수준 등을 보다 과학적으로 분석 정리하여 식물적용학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했다.

한젠의 식재 원리와 개념들이 다소 복잡할 순 있어도 하나의 문장으로 쉽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형태는 생명을 따른다”, 즉 디자인은 생명을 따른다. 식물이라는 생명이 살아가는 방식과 삶터에 초점을 맞출 때 여러 식물들이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며 그 본연의 아름다움과 지속성을 선사하는 것이다. 한젠은 식물 개개의 특성을 고려해서 구조식물, 동반식물, 지피식물, 채움식물, 구근식물로 적용 유형을 구분하는 입체적인 설계 방식을 선보였다. 이후 우르스 발저, 카시안 슈미트, 로즈마리 바이세 등의 정원디자이너는 한젠의 방식을 계승하고 보완하여 정원박람회 부지를 비롯한 여러 공공공간에서 오래 지속되고 미적이며 유지관리가 쉬운 식재를 실제로 구현해냈다.

자원 소비와 환경오염 및 파괴로 인해 지속가능성과 생물다양성이 주목 받고 있는 현 시대에는 이전 방식과 다른 ‘새로운’ 접근법이 요구된다.

리하르트 한젠 교수의 제자 우르스 발저 교수가 개발한 배식패턴. 소위 “발저클래식”으로 지금도 널리 모방되고 있다. 출처: Stefan Körner

다시, 칼 푀르스터

식물적용학을 보다 심도 있게 공부하면 할수록 이따금 아주 기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이 식물적용학 지식으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사실 정원 공부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긴 하지만 단순히 그것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질문을 할 때마다 나는 칼 푀르스터를 생각한다. 온 지구 전체를 꽃으로 채운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던 순수하고 열정적인 독일 정원사 칼 푀르스터 말이다. 푀르스터는 두 차례 세계대전이 일어난 격동기 속에서도 꽃의 아름다움으로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 믿었고 정원 일을 일생의 사명으로 여겼다. 나는 칼 푀르스터가 오래 전에 그렸던 그 꿈에 동참하고 싶다. 식물이 지닌 부드러운 힘이 사람들의 일상에 새로운 기쁨과 감동을 안겨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칼 푀르스터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러해살이풀 중심의 식재가 강인하게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 한두 해 넘어가면 없어지거나 계절마다 새로 심는 게 아니라 오래 지속되고 아름답고 유지관리가 쉬운 식재를 구현하여 그 절약된 비용을 다른 곳에 식재하는 데 쓰는 것이다(식재 비용으로 쓰이지 않더라도 더 의미 있는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식물적용학의 지식을 활용해서 공원뿐만 아니라 공개공지, 교통섬, 분리대녹지 등 도시에서 흔히 접하는 ‘일상의 자연’에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아름다운 식재를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초화식재들은 봄이 오기 전 늦겨울에 전체를 베어내는 것 말고는 추가적인 관수와 제초를 거의 하지 않고도 잘 유지된다고 한다.

지금까지 내가 진행한 프로젝트들 중에서 식물적용학 지식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프로젝트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동료들과 함께 서울식물원에 조성한 초지정원이다. 다채로운 식물들을 섞어 심어서 풍부한 계절감을 잘 담아냈다고 자평하지만 볏짚 멀칭재의 사용으로 잡초가 많이 들어섰고 습한 땅에 건조한 곳을 선호하는 식물이 많이 녹았다. 이때의 경험과 보다 진전한 식물적용학 지식으로 작년 한 아파트 단지에 100제곱미터 면적의 초지정원을 조성했다. 아파트 내에서 빛이 잘 드는 곳이었기에 정원서식처 개활지(FR, Freiflächen)에 해당하는 식물을 사회성 수준을 고려해서 심었고 잡초 방지에 효과적인 왕마사로 멀칭을 했다. 현재까지는 기존에 작업해왔던 정원 식재들에 비해 유지관리가 쉬웠고 보기에도 좋았다. 이년차에는 어떠한 모습일지, 관리의 손길 없이도 잘 지속될 수 있는지 지켜볼 예정이다.

온 지구 전체를 꽃으로 채우는 것은 담장 안에 감춰진 내밀한 개인정원을 넘어 그것이 공공의 영역까지 확장되었을 때 실현이 가능하다. 아우돌프의 정원이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정원과 식재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이 공공공간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는 자연은 그 규모가 제한적이다. 하지만 식재의 미학은 공간의 크기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식재는 시간에 따라 발현되는 계절 양상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시간성이야말로 공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인데 이런 관점에서 식물적용학이 정원사들에게 새로운 길을 안내해줄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일상의 자연이 풍성한 계절감과 함께 다양한 꽃이 피고 지며 사람들의 웃음이 가득한 정원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꿈꾼다. 칼 푀르스터가 자주 언급하던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계속 꽃이 피어날 거야(Es wird durchgeblüht)

– 칼 푀르스터

오세훈은,

가천대학교 조경학과에서 공간과 식물을 공부하고, 조경그룹이작에서 디자인을 배웠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내일을 꿈꾸며, 다양한 식물이 건강하고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식재 방식을 연구하고 있다. 《식재디자인 : 새로운 정원을 꿈꾸며》를 번역하고 《자연정원을 위한 꿈의 식물》과 영화 <다섯 계절 : 피트 아우돌프의 정원>을 공동 번역했다.

ideumhae@naver.com

Instagram: ideumhae_

대문이미지: 우르스 발저 교수의 대표작, IGA Stuttgart 93. 숲자락. 출처: Cassian Schmi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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