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시립대학 캠퍼스로 거듭난 르네상스 정원
뭔가 조사할 것이 있어 뒤적거리다가 이런 소식과 접했다.
“이탈리아 피렌체 외곽에 있는 르네상스 빌라 하나가 지금은 미국 뉴욕시립 대학 소유다. 마지막 소유주가 1994년 후세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23헥타르 규모의 빌라와 정원을 뉴욕시립대학에 기증한 것. 마지막 소유주는 미국계 영국 작가 하롤드 액튼Harold Acton(1904~1994) 경이었다.”
이 이야기에 접하고 아래와 같은 의문이 떠 올랐다.
의문 1:
피렌체 외곽의 빌라가 어떻게 영국작가의 소유가 되었을까?
의문 2:
그리고 그는 왜 하필 뉴욕시립대학에 빌라와 정원을 기증했을까?
의문 3:
뉴욕시립대학에선 그 빌라를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나?
그것이 궁금했다. 해답 찾기 오디세이가 시작되었다.
라 피에트라 빌라 정원 Villa La Pietra
첫째 의문에 대한 답은 비교적 쉽게 찾았다. 영국작가 하롤드 액튼에 관해 위키 백과 설명이 있기에 살펴보니 그 빌라가 그의 부모 소유였단다. 부모가 대체 누구기에. 그 부모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두 번째 의문도 ‘어느 정도’ 풀렸다.
아버지 아서 액튼은 영국 귀족이었는데 피렌체에서 태어난 교민이었다. 직업은 화가, 디자이너, 미술상. 1900년대 초에 시카고에 가서 어느 은행의 실내 디자인을 돕다가 그 은행 소유주의 딸 호르텐스 미첼을 만나 결혼했다. 금융계 거물의 딸이었다. 깔려죽을 만큼 돈이 많았다. 혼인한 뒤 남편의 집이 있는 피렌체로 가서 살았다. 아들 둘을 낳았다.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피렌체 외곽에 있는 르네상스 빌라와 그에 속한 토지를 구입했다. 빌라 이름은 “라 피에트라La Pietra”.((“라 피에트라”는 돌이라는 뜻인데 여기선 돌로만든 이정표를 말한다. 로마에서 그 마을까지의 이정표가 서있는 곳에 빌라를 지어서 그리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시카고 출신이니 시카고 대학에 기증해도 될 법 한데 뉴욕시립대학에 기증한 연유에 대해서는 어디서도 밝히지 않고 있다.
둘째 의문에 대한 답
이럴 가능성은 있다. 뉴욕시립대는 글로벌 대학으로 전세계에 분교를 설립했다. 베를린에도 있다. 그러므로 이탈리아에 분교를 두고 운영할 수 있는 기본 시스템과 인프라가 준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혼인하여 피렌체에서 살기 시작했을 무렵, 피렌체에는 제법 큰 “영미 교민사회” 내지는 공동체가 존재했다. 호르텐스와 아서 부부처럼 부유한 미국인, 예술가, 시인, 지식인, 영국 귀족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이탈리아의 오래된 문화와 예술을 탐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부유했다. 피렌체 근방에 널린 것이 오래 된 빌라이니 저마다 하나씩 사서 고대 로마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을 삶을 모방하며 살았다.
다만 그들의 공적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이탈리아 정부나 문화재청에서 미처 하지 못하는 일, 즉 건축과 정원의 복원 작업을 이들이 맡아서 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해서 복원된 르네상스 정원이 17개소 정도 된다고 한다. 모두 문화적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고증을 해가며 제대로 복원했다.
아서와 호텐스 부부가 1908년에 구입한 라 피에트라 빌라는 15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것이었다. 건물만 원형을 간직했고 정원은 영국 풍경식으로 완전히 개조되어 있었다. 영국인이었던 아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국풍의 정원을 모두 드러내고 그 아래 숨겨진 르네상스 정원의 흔적을 찾아 복원 작업에 들어갔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할 무렵까지 근 30년에 걸쳐 복원에 열중했다.
정원복원 작업과 함께 부부는 부지런히 미술품, 조각상, 고서적도 수집했다. 어머니 호르텐스는 미술품을 빌라에 보기좋게 전시하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그 어머니는 1964년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이 2차 대전 중에 죽었기에 모든 것이 큰 아들 하롤드 액튼 경의 소유가 되었다. 그가 1994년 유산을 뉴욕시립대학에 기증하고 죽었을 때 집은 다섯채로 늘어있었고 미술품 약 5,500 점, 귀한 책이 약 일만 권이었다.
이를 모두 뉴욕시립대에 기증한 것은 현명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문화재가 너무 많아 일일이 다 챙길 수 없는 이탈리아나 피렌체 당국에 기증했으면 다시 백 년의 잠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현재 빌라와 정원, 미술 소장품 전체가 이탈리아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관리와 운영은 뉴욕시립대에서 도맡아 하고 있으며 정원 복원 작업도 꾸준히 하고 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셋째 의문에 대한 답
뉴욕시립대가 빌라와 정원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 지에 관한 세번째 의문을 풀기 위해 웹사이트를 찾아 들어가 살펴 본 결과 그런 결론이 내려졌다. 액튼 가족은 유산을 ‘지속가능’하게 제대로 관리해 줄 기관을 찾았고 그것을 뉴욕시립대에서 찾은 것 같았다.
뉴욕시립대 피렌체 분교NYU I Firenze의 공식 사이트에 들어가 보고 정말 ‘신선하게’ 놀랐다. 사이트를 참 아름답게 만들기도 했지만 우선 빌라와 정원을 캠퍼스로 제대로 활용하고 있고, 지속적인 유지관리에 힘쓰고 있으며 소장 예술품과 도서 역시 훌륭한 수준으로 전시 내지는 보관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일반 방문객에게도 개방하여 정원과 박물관 투어를 제공하고 있다.
뉴욕시립대 학생들은 여기 캠퍼스에서 해외 학기를 이수할 수 있다. 핵심 학과는 인문학, 사회과학이며 미술사, 역사, 문학, 영화 등의 코스도 제공한다. 또한 여러 문화 행사를 개최하고 피렌체 소사이어티와도 왕성히 교류하는 듯 했다. 학생들은 전공은 아니지만 정원 가꾸기, 채소밭과 과수원 실습도 하고 정원에서 연극, 콘서트, 파티도 하는 등 매우 다채롭게 이용하고 있다. 즉,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살았던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롤드 액튼 경
피렌체 북쪽, 몬투기 언덕에 자리잡은 빌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하롤드 액튼 경은 피렌체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스위스 기숙학교를 거쳐 영국에 가서 이튼 고등학교와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2차 대전이 터져 참전할 때까지 학교 교사로 일했다. 전쟁 뒤에야 비로소 피렌체로 돌아와 빌라에 눌러 앉았다. 그리고 집필에 전념하는 한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원 복원 작업을 지속했다. 본래 정원이란 것이 다 복원하고 나면 처음 복원한 부분이 낡아지게 마련이라 평생 매달려야 하는 일이다. 1994년, 만 8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수많은 시, 소설, 논픽션 저서를 남겼다.
특이하게도 그는 자서전을 두 번이나 썼다. 1948년 44세에 <어느 심미가의 회상록>이란 제목으로 첫 자서전을 쓰고, 1970년 <어느 심미가의 더 많은 회상>이란 제목으로 두번 째 자서전을 냈다. 아마 자신이 그리 오래살 줄 모르고 2차 대전 후에 바로 자서전을 썼다가 60세가 넘어서 그간의 일을 보충했을 것이다.
그의 회상록은 개인의 삶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피렌체 문화사에 대한 기억이라 보는 것이 옳겠다. 특히 빌라와 정원의 역사에 대해 무척 꼼꼼하게 조사하고 상세하게 서술했다. 그는 동성애자로서 결혼을 하지 않고 독일 사진 작가 알렉산더 칠케와 함께 살았다. 알렉산더 칠케는 자신들이 살던 빌라와 정원을 비롯하여 토스카나 일대의 사진을 찍어 액튼과 함께 “토스카나의 빌라”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Harold Acton; Alexander Zielcke (1984), Villen der Toskana))
정원의 재구성
15세기 초, 마친지라는 사람이 처음 빌라를 지었을 때만 해도 르네상스 풍이라기 보다는 전원의 농지를 관리하기 위한 시골집 형태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1460년 은행가 프란체스코 사세테가 구입하여 비로소 르네상스 풍으로 고쳐 지었다. 1545년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사세태 가문에서 유지하다가 17세기에 카포니 추기경에게 팔았다. 추기경은 건물의 입면을 당시 유행에 따라 바로크 풍으로 개조하고 실내에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게 했지만 그 외 원형에는 손대지 않았다.
1877년까지 카포니 가문이 소유했었다. 사세테도 카포니도 휴머니스트로서 정신적 문화적으로 르네상스의 정서 속에 푹 잠겨서 살았던 사람들인 것 같았다. 거의 정석대로 고문서와 조각상을 수집하고 정원에서 지인들과 모여 시를 짓고 음악을 연주하며 보냈다. 다만 그때 정원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도면이나 그림 등의 기록이 없어 유추하기 어렵다.
1877년 이후부터 1908년 사이의 소유 관계는 불분명하다. 한 가지 이 시기에 풍경식 정원으로 개조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 상태에서 액튼 부모가 깨울 때까지 백 년 간의 잠에 빠져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액튼 부모는 원형이 어땠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비교적 잘 보존된 인근의 보볼리 정원과 카스텔로 정원을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여러 정황이 프랑스의 빌랑드리 정원과 매우 흡사하다.)
정원에 대한 묘사는 생략하고자 한다.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액튼 경이 자서전에서 묘사한 것을 옮길 수는 있지만 그것보다는 사진을 몇 장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내가 직접 본 정원이 아니기 때문에 물론 사진도 찍은 것이 없다. 사진은 뉴욕시립대에서 빌렸다.
문득 우리나라 대학도 이런 식으로 해외 분교를 운영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여러 대학에서 동남아에 분교를 설립한 것 같은데 한국 학생들의 해외 학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지 학생들이 입학하는 시스템인 모양이다.
한국 학생들이 기왕 유럽으로 해외 연수를 많이 가는데 우리나라 대학은 뉴욕시립대처럼 이탈리아 등지에 분교를 설립할 만한 여력이 아직 안 될까? 한국 사립대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한데 이렇게 의미있게 투자해 보면 어떨까. 하긴 동남아에 설립한 분교도 운영이 어렵다고 우는 소리 하는 것을 들었다. 어쩐지 믿기지 않는다.
고정희
사진 크레딧: NYU Florence/Villa la Pietra/VLP Garden
외부 고리
NYU Florence Website →
방문 정보
주소
Villa La Pietra
Via Bolognese, 120
50139 Firenze, Italia
Tel.: +39 055 5007 210
Fax: +39 055 5007 333
villa.lapietra@nyu.edy
가이드 투어
- 매주 금요일: 정원과 미술 소장품 가이드, 사전 예약.
- 매주 화요일: 정원 가이드 투어, 사전 예약
Open Weeks
- 4월/10월 셋째 월요일에 시작. 한 주 동안 무료 가이드. 한달 전에 예약해야 함.
- 예약: http://www.nyu.edu/lapietra/
Map
© 써드스페이스 블로거진/르네상스 정원/Villa La Pie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