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늑대와 늙은 여우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상황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그 싸움터가 정치판이라면 늙은 여우가 이길 확률이 높다. 늙은 여우 콘라드 아네나워가 젊은 늑대 빌리 브란트를 골탕먹인 이야기다.
“루르 지방의 하늘을 다시 파랗게”
“루르 지방의 하늘을 다시 파랗게”는 1961년 4월 28일 야당 사민당 대회에서 총리 후보로 나선 ‘비교적’ 젊은 빌리 브란트가 외친 구호였다. 당시 48세였으니 총리 후보치고는 젊었던 셈이다. 지금은 별로 심각하게 와 닿지 않는 구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당시에도 그랬다고 한다. 루르 지방의 하늘이 새카많다는 뉴스가 연일 들려왔어도 사람들은 ‘그러려니’ 했다고 한다.
여당 기민당 당수 에르하르트는 <그게 뭔 목사탕같은 소리냐. 산업지대의 먼지는 농촌의 퇴비와 같다!>라고 응수했다. 독일의 흑 역사다. 환경독일이 늘 환경독일이 아니었다는 뜻도 된다.
당시에는 공기를 청정하게 유지하라고 규제할 법이 아직 없었다. 1869년도의 낡은 법이 여전히 적용되고 있어서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연소된 석탄 1톤 당 30 킬로그램의 이산화황이 발생한다고 학자들이 목청을 높여도 속수무책이었다.
루르 지방 주민연합이 철강기업을 법정에 고소해도 재판장은 앵무새처럼 <현행 법에 따르면 아무 하자 없음.> 이라 선고하고 판사봉을 두드렸다. 뭐든지 법대로 하는 사람들이기에 새로운 법이 만들어져야 했다.


언론의 힘
빌리 브란트가 선거에서 공약으로 내 건 것이 바로 새로운 환경법이었다. 대기오염물질 방지법을 만들 것이라 외쳤다. 여당과 산업연맹에서는 조소를 퍼부었지만 언론은 브란트의 구호에 재빨리 반응했다. 영향력 있는 시사 주간지 <데어 슈피겔Der Spiegel> 지가 바로 특집을 만든 것이다. 여러 주에 걸쳐 철저히 취재한 뒤 전국의 수천 개 산업배출시설 목록을 작성하여 지면에 실었다. 그리고 이런 슬픈 사연을 전했다.
루르지방의 어린이들은 매일 작은 폼페이 화산폭발과 맞먹는 검은 먼지를 참아내야 한다.
Der Spiegel 1961/33
아이들 평균 신장과 몸무게가 다른 주의 아이들에 비해 20% 떨어진다. 하늘을 검게 덮은 먼지로 인해 햇빛이 삼분의 일만 투과하고 집 값도 삼분의 일로 떨어졌다.

여론이 들썩이기 시작했고 빌리 브란트 선거운동실에서는 루르 지방 유세 때 <파란 하늘>을 더 크게 외치고 다녔다. 지방신문에서도 연거푸 기사를 싣자 여당에서는 급기야 <파란 하늘 비웃기 작전>을 철회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지금껏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는 세금을 많이 내는 산업 편을 들어주었었다. 그러던 것이 수뇌부에서 부랴부랴 미국 철강산업단지로 시찰을 떠났다. 다녀와서는 <그쪽 하늘은 맑더라. 우리 하늘의 검은 구름도 사라져야 한다>고 말을 바꿨다. 법 제정도 약속했다. 그리고 발 빠르게 움직여 법초안을 내놓는 한편 연방의 당본부 동료들에게 너희들도 연방법을 만들어 보라고 넌지시 귀띔했다. 본의 연방의회에서 기민당이 갑자기 대기오염 방지에 대한 법제정을 발의했고 – 이제는 깨끗한 공기에 찬성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으므로 –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콘라드 아데나워 여당 총리 후보가 자기도 파란 하늘을 내세워 유세에 나섰다.
“여러분! 산업계가 그동안 돈 많이 벌었습니다. 이젠 그 돈을 국민들 건강을 위해 쓸 때가 되었습니다!” 박수 짝짝짝. 정치가들이란. 늙은 여우 아데나워가 선거에 승리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빌리 브란트는 닭쫓던 늑대가 되어 이렇게 메모를 휘갈겼다고 한다. “처음엔 야유를 양동이로 퍼붓더니 이제는 지들이 먼저 나서네. 정말 그냥~”
뒤통수를 얻어 맞은 건 빌리 브란트 만이 아니었다. 기업들 역시 그동안 믿었던 여당에게 발등을 찍힌 꼴이 되었다. 대기청정을 위해 값비싼 여과 시설을 설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이들에게 중재자들을 보내 넌지시 언질을 주었다. 세금 혜택을 넉넉히 주겠노라고. 그냥 대세에 따르라고.
빌리 브란트는 이로부터 8년이 지난 1969년에 드디어 총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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