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멋진 사진은 사진작가 Christian Kaiser님이 제공한 것임. https://kaiser-knick.com


독일어에 크닉Knick이라는 말이 있다. 꺾임, 접힘 또는 꺾인 곳, 접힌 곳을 뜻한다. 통계학에서도 쓰는데 곡선이 정상을 그리고 가다가 갑자기 이상현상을 나타낼 때도 크닉이라고 한다.

그런데 풍경 요소 중에서도 크닉이라는 것이 있다. 북부 독일의 환경관련 자료에 많이 등장한다. 이 경우 지역 언어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크닉과는 그 뜻이 다르다.

여기서 크닉이란 농촌 풍경에 나타나는 요소인데 긴 설명보다는 위의 사진을 보면 단번에 이해될 지 모르겠다.

북부독일 뿐 아니라  덴마크 등의 북유럽과 프랑스, 스페인, 포루투갈의 농경지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덴마크어: Læhegn, 프랑스어: Talus 또는 clôture].

전통적으로 방목지나 경작지의 경계를 표시하고 바람을 막기 위해 흙으로 둔덕을 만들고 돌무더기를 쌓은 뒤 그 위에 버드나무 등을 심은데서 유래했다. 이런 둔덕 식재지를 “크닉”이라고 한다.

제주도 돌담처럼 전통적인 문화경관으로 보호하고 있을 뿐 아니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에서는 보호비오톱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걸 번역해야 할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적절하게 가져다 붙일 한국어가 없기에 이리저리 말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번역하게 된다. 예를 들어 수목띠, 수목벨트, 자연형 수목군락, 둔덕 식재지 이런 식이다. 그리고는 각주를 달아 자세히 설명하고 사진도 한 장 첨부한다.

문제는 사진이다. 함부르크에 자주 가기는 해도 여태 크닉 사진을 제대로 찍은 것이 없다. 자료 만들다가 중간에 아참 사진이 마땅한 것이 없네. 그리고 당장 함부르크로 달려가서 사진을 찍어 오면 좋겠지만 그게 여의치 않기 때문에 별 수 없이 다시 인터넷을 뒤진다. 연방 자연보호 연구기관 사이트에 들어가면 사진이 있기는 한데 독일 깍쟁이들이 우표딱지만한 크기로 올려놓아 별 쓸모가 없다.

그러던 중 크리스티안 카이저Christian Kaiser라는 사진 작가의 사이트를 발견했다. 풍경사진 전문가인 듯했다. 크닉 사진을 찍어 달력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할 정도로 멋진 크닉 사진을 많이 찍었다. 이메일을 보내 이만저만하다고 설명하고 사진을 제공해 줄 수 있는가고 문의했다. 비용을 청구하면 포기하고 함부르크에 가서 직접 사진을 찍어 올 참이었다. 독일 사진 작가에게 한 번 크게 당해 거의 백만원에 가까운 사진 이용료를 지불한 적이 있으므로 이제는 몹시 조심스러워져서 번거롭더라도 일일이 이메일을 보내 문의한다.

문제의 사진 작가는 토마스 볼프Thomas Wolf라고 하는데 알고 보니 네티즌 상에서 꽤 유명했다. 나처럼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어서 포럼에서도 화제의 대상이었다. 볼프는 위키메디아에 사진을 제공해 놓고는 곧 인터넷 상에서 수색에 나선다. 그러다가 작가 이름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표기하지 않은 경우 사전 경고도 없이 다짜고짜 고가의 청구서를 보낸다. 사진 한 장 당 수백만원 가까이 되는 어처구니 없는 금액을 요구한다. 아직 온라인 상의 사진 이용권에 대한 비용이 규정화 되지 않은 틈을 탄 것이다. 변호사에게 문의했더니 적당한 선에서 합의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조언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평생 따라다니며 골치아프게 할 인사라는 것이다.

물론 크리스티안 카이저 같은 작가도 있다. 한국에 함부르크의 풍경요소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하다니까 사진 두 장을 무료로 제공해 주었다. Danke, Herr Kaiser!

클로즈업 하면 둔덕이 보인다. Knicklandschaft. Photo: Christian Kaiser. https://kaiser-knick.com

몇 해 전부터 사진 저작권에 대한 히스테리가 온라인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내 짐작이지만 아마도 Getty Images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닌가 싶다. Getty 사에서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사진 작가들의 저작권을 싺쓸이 하다시피 사들여 이를 고가로 거래하기 시작한 뒤로 온라인 선상에서 사이좋게 사진을 나눠 쓰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제는 게티 이미지 뿐 아니라 유사한 회사들이 속출하여 그 부작용이 적지 않다.

몇 주 전, 베를린 건축박물관 아카이브 담당자와 얘기한 적이 있는데 요즘 박물관, 도서관 아카이브에선 저작권 챙기기에 바빠 다른 일을 못한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런 곳에선 사진 작가가 불분명하거나 이미 사망한지 오래 된 사진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어느 유명 조경가의 작품 사진이 그의 사후에 다른 자료와 함께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전달된다. 이때 그 사진의 저작권은 사진 작가가 가지고 있지만 사진 속 작품의 저작권은 조경가가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정원 소유주 역시 한마디 할 수 있다. 그리고 물론 건축이 함께 찍힌 경우 건축가 역시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다.

여태까지의 저작권법에 따르면 그 사진을 보유하고 있는 박물관의 허가를 받으면 사진을 쓸 수 있었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서 박물관에서도 사진 작가의 상속자, 조경작가의 상속자, 건축가의 상속자 그리고 정원 주인의 상속자를 죄다 찾아 협약을 맺어야 한다. 그런데 그 일이 그리 쉽지 않다. 아무리 찾아도 찾아지지 않던 상속자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금전을 요구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고 한다. 게티 이미지스 등의 대형 에이전시에서 <사진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사람들의 욕심을 부추긴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박물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작품 사진을 쓸 때 마다 두 페이지에 달하는 이용권 협약서에 서명을 해서 보내야 한다.

아래 사진의 경우 운이 좋은 케이스다. 집과 정원과 인물이 모두 나와 있지만 이 집을 설계한 건축가 한스 샤룬이 사진을 찍었다. 정원을 만든 사람은 집 주인 마테른 부부다. 정원에 아이와 함께 서 있는 인물이 헤르만 마테른이며 방안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인은 그의 아내 헤르타 함머바허다. 헤르만 마테른과 헤르타 함머바허의 상속인이 같은 사람이라 얘기가 좀 단순해 진다. 즉 그들의 손자인데 사진 속 정원에 서 있는 꼬마가 나중에 커서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다. 이 양반은 지금 기성 건축가가 되었는데 조부모의 작품에 대해 연구하고 글 써 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얼마든지 쓰라고 하며 자신의 권리를 전혀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작정 사진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을 보유하고 있는 박물관이 소유권과 이용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박물관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당시 사진을 찍은 한스 샤룬이 사진을 여러 장 뽑아 두 부부에게 주었으므로 같은 사진이 한스 샤룬 아카이브, 마테른 아카이브, 함머바허 아카이브에 모두 존재한다. 아래 사진의 경우 2002 년경, 아직 저작권 히스테리가 발생하기 전 한스 샤룬 아카이브에서 주문하여 스캔한 것이다. 물론 발표할 때마다 이용권을 갱신해야 하지만 그때 썼던 내 책에 실린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 인용>이라는 명목으로 다시 쓸 수 있다. 그리고 사진 크레딧에도 그리 표기해야 한다. 가난한 학자들, 연구인들을 위해 마련한 규정이다. 이미 한 번 출판된 적이 있는 사진은 그 책에서 <인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글귀처럼 사진도 인용할 수 있다는 규정이다. 독일에서는 가능한데 프랑스 등지에선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독일에서도 이 규정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현재 유럽 연합 차원에서 저작권 규정을 통일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고 프랑스 등 다른 국가에서 양보하지 않으면 <사진 인용>이라는 좋은 규정도 물 건너 갈 수 있다.

작가들 사후 70년간 상속자들이 저작권을 보유한다는 규정 덕에 발생한 <세기의 오스카 슐렘머 사건>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에….

마테른과 함머바허의 집과 정원. 한스 샤룬이 건축을 설계하고 마테른과 함머바허 부부가 직접 정원을 디자인 했다. Archiv Scharoun, Akademie der Kuenste Berlin; Jeong-Hi Go 2006. S.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