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207쪽에 보면 이탈리아 파도바 식물원의 화단 배치도 도면들이 피사의 기록보관서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누가 발견했는지 몹시 궁금한데 그걸 알아내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것 같네요.) 그리고 그 도면 중 일부는 “건축가 세를리오가 출간한 도면과 아주 비슷했다.” 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그러나 홉하우스 여사는 건축가 세를리오가 누구인지도 그가 언제 어떤 도면을 출간했다는 것인지, 어떤 도면이 식물원 배치도와 비슷하다는 건지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선 해설편의 인명란에 간략하게 “건축가 세를리오”가 누구였는지 설명해 두었습니다. (223쪽)
그 외에 237쪽 그림 5.6 에서도 “세를리오의 것과 매우 유사한 화단양식” 이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역시 아무 설명이 없고 253쪽, 그림 5.21 에 비로소 “세를리오의 기하학적 화단 설계를 담은 『건축서 De Architetture Libri Quinque』의 4권” 이라고 얘기합니다. 278쪽에는 세를리오가 프랑스 왕 프랑수아 I세를 위해 일했다고 언급하고 1537년에 세를리오가 발표한 도안들이 “유럽 최초의 화단 문양”일 것이라 추정했습니다. 유럽 최초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이전 것이 발견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퍼즐조각들을 맞추어 보면
“세를리오라는 이름의 건축가가 있었다. 그는 1537년 화단 문양도면을 그려서 그의 저서 (건축서)에 출간했는데 이는 유럽 최초의 화단 문양이라 할 수 있으며 자수화단을 만드는 데 많은 영감을 주었다. 또한 파도바 식물원의 화단 배치 역시 여기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세를리오는 프랑스 왕실에서 프랑수아 1세를 위해 일했다.”가 되겠습니다.
건축가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의 생애와 작품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Sebastiano Serlio (1475-1554)는 이태리 볼로냐 태생의 건축가였으나 작품보다는 건축이론서 저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건축이론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일곱 권의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물론 일곱 권을 한꺼번에 출간한 것이 아니라 1537년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발표했으며 1575년, 그의 사후에 마지막 7권이 출간되었습니다. 그의 저서들은 출간되는대로 널리 읽혀 르네상스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의 건축론의 바탕이 된 것은 스승 발다사레 페루치Baldassare Peruzzi 가 그에게 물려 준 유산이었습니다. 스승 페루치가 숱한 작품을 남긴 출중한 건축가였다면 세를리오는 디자인보다는 제도에 능하고 이론에 강했던 듯 합니다. 페루치가 틈틈히 고대 로마의 건축을 연구하여 정리해 둔 것이 있는데 이 자료를 세를리오에게 물려줍니다. 아마도 세를리오의 작가로서의 재능을 알아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여 페루치의 유산이 세를리오 건축서 7권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와 그의 후예들이 그를 표절가라 부르게 되었죠. 그러나 후에 두 사람의 자료를 서로 비교해 본 결과 표절이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세를리오 건축론 7권을 발간한 연대순으로 정리해 보면 :
- 4권: 건축학 개론, 베니스 1537 (정원 파르테르 문양 사례 제시)
- 3권: 로마 고대건축의 현황조사, 측량기법, 베니스 1540
- 1권과 2권: 기하학과 원근법, 파리 1545
- 5권, 신전건축, 파리 1547
- 부록 (6권): 포털 디자인, 리용 1551
- 7권: 기타 특별한 상황과 고건축 복원법에 대하여, 프랑크푸르트 1575 (세를리오 사후에 출간)
세를리오는 1528년 베니스 상원으로부터 건축 5대원칙 (토스카나 양식, 도리스 양식, 이오니아 양식, 코린트 양식, 복합 양식) 에 대한 저작권을 얻었으며 그의 저서 제4권, 건축학 개론 편에서 5대 기둥양식을 정리하고 설명합니다. 바로 이 4권 마지막 부분에서 “정원에 적용해봄 직한 미로”들을 예시한 겁니다. 4권을 가장 먼저 출간한 까닭은 기하학이나 원근법 등의 딱딱한 이론보다는 일반적인 개론이 독자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듯하여 그리했다고 합니다.

세를리오의 계산이 적중한 듯했습니다. 제일 먼저 출간된 4권 건축학 개론은 이미 2년 뒤 1539년 플랑드르 언어로 번역되었고 이후 속속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세를리오의 저서는 유럽에서 16세기에 가장 널리 읽힌 건축서가 되었고 스페인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에도 전달되게 됩니다. 그 중 4권이 가장 유명한데 그 까닭은 고전 5대 기둥 양식에 대해 매우 심도 있게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세를리오 이전에도 기둥 양식에 대해 이론이 많았는데 세를리오가 정리한 것이 가장 출중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스승 페루치 외에도 선배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와 먼 고대 로마의 비트루비우스Vitruvius를 참고했을 것이나 세를리오가 전에 없던 새로운 저작 방식을 적용하여 널리 읽힌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는 에세이 형식을 빌어 설명하고 이따금 삽도를 첨부하는 방식을 취했으나 세를리오는 백과사전 식 서술양식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직접 그린 도안들을 먼저 첨부하고 각 도안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곁들인 식이어서 전문가가 아닌 일반 대중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분명 혁신적 서술 방식이었지만 이후 그의 방식이 일반화되면서 오히려 그의 공적이 묻혀버리게 되었습니다. ((William Bell Dinsmoor: “The literary remains of Sebastiano Serlio” In: Art Bulletin. Jg. 24 (1942), H. 1, S. 55–91.))
세를리오의 영향
비뇰라 Giacomo Barozzi da Vignola, 스카모치Vincenzo Scamozzi, 팔라디오Andrea Palladio 등의 유명건축가가 세를리오의 이론을 참고함으로써 이들을 통해 세를리오의 건축이론은 20세기까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특히 세를리오가 제안한 좌우 대칭의 삼분디자인이 세를리아나Serliana라 불리며 베니스에서 널리 적용되었으며 팔라디오가 이를 응용하여 르네상스 건축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를 베니스 양식이라고도 하고 팔라디오 양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프랑스 왕실에서
세를리오의 저서 4권이 크게 성공하면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그에 주목하여 프랑스로 초빙하게 됩니다. 퐁텐블로 궁전을 지을 때 참여하여 왕실건축가, 화가라는 명칭을 얻고 높은 보수를 받았지만 그 이후 작품 생활은 뜸해집니다. 궁전을 짓는 것이 프랑수아 1세의 취미이긴 했으나 세를리오 보다는 다른 건축가들을 선호했던 겁니다. 세를리오는 귀족들의 용역을 받아 몇 개의 작품을 남긴 것이 전부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샤토 앙시 르 프랑 입니다. 프랑스에서 그의 작품이 크게 각광받지 못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건축은 철저한 고전적 원칙 하에 디자인되어 매우 심플했는데 당시 프랑스 왕실과 귀족들은 장식적이고 동화 속의 궁전 같은 건축을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