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유럽에서 성이나 궁전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폐허와 유적지까지 다 합치면 이만 오천 개 정도에 달한다고 한다. 중세 천 년을 마을 단위로 잘게 쪼개진 채로 살았고 각 마을을 다스리던 귀족들이 저마다 튼튼한 성과 궁전을 여러 개 짓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 덕에 평생 성과 궁전만 연구하며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물로 그 성들이 죄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나 슈베린 성과 같지는 않지만 크거나 작거나 탑이 있고 성문과 성벽이 있어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그 중 라인란트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성으로 꼽히는 곳으로 딕성이 있다. 딕성은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상당히 아름다운 수성水城 인데 위헨 Jüchen 이라는 아주 작은 고장에 위치하고 있어서 일반 관광객들에겐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감춰진 보물이다.

라인란트 지방은 독일 서부, 라인 강 상류 및 중류 지역을 말하며 중세로부터 이 지역에 자리 잡았던 여러 공국들을 합쳐서 그리 일컬었다. 지금의 헤센 주 일부, 라인란트-팔츠 주 및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를 포함한다. 주요 도시로는 쾰른, 뒤셀도르프, 에센, 도르트문트, 뒤스부르크, 마인츠, 트리어 등이 있으며 크고 작은 공국 다수가 경계를 나란히 하고 있던 관계로 유난히 성이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딕성은 13세기 말부터 딕 가문에서 지었기 때문에 그리 불린다. 이후 여러 번 파괴되고 재건하기를 거듭하다가 18세기에 이르러 당시 주인이었던 살름 라이퍼샤이트 딕 영주(왕자 계급)가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하여 지금까지 그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세계 제 2차 대전 때 부분적으로 파괴되었으나 곧 보수됨).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당시 유행했던 정원 양식을 덧붙여 지었기 때문에 중심부에 바로크 정원을 두고 사방에서 풍경화식 정원이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정원사의 관점에서 볼 때 딕성이 진짜 보물인 이유는 그 때문 만이 아니다.

2002년 이곳에서 라인란트-팔츠주와 유럽 연합 공동으로 정원박람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때 뉴가든이라고 해서 성 바로 외곽의 경작지를 정원으로 전환한 것이 있고, 바로크 정원과 풍경화식 정원 사이에 넓은 면적을 별도로 할애하여 <정원 실무 샘플 정원>을 지은 것이 있는데 이들은 딕성을 역사 속에서 끄집어 내어 지금 생생하게 살아 있게 만드는 중요한 연결고리이다.

다시 정리해 보면 딕성의 정원은 크게 바로크 정원, 풍경화식 정원, 정원실무 샘플 정원 및 뉴가든의 네 구역으로 구분된다.

정원


풍경화식 정원

수성이므로 물속에 앉혀진 형상이 특히 매력적인 성이다. 18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증축하면서 성 주변에 넓은 풍경화식 정원을 조성했다. 토마스 블레이키,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 웨이, 페터 요셉 르네 등의 조경가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완성했다. 이때 기존의 바로크 양식 정원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식물 수집, 정원 식물 도서관

영주 자신이 식물학자로 명성이 높았고 식물 수집광이어서 드넓은 풍경화식 정원에 진기한 나무를 많이 심었다. 여기서 자라는 모든 식물을 총 망라하여 “딕 성의 정원Hortus Dyckensis”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또한 도서관을 짓고 방대한 분량의 식물 관련 서적을 수집했다. 1999년에 발족한 딕 성 문화재단에서 현재 이를 관리하고 있다.

뉴가든  – 혹은 디커펠트(딕의 벌판)

2002년 정원박람회(EUROGA) 개최지

2002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서 유럽 정원박람회를 개최할 때 딕 성이 중추를 이루었다. 딕 성의 영지에 속했던 토지 중 24 헥타르의 경작지가 휴경지로 남아 있었는데 이곳에 새로운 공원을 조성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동시에 풍경화식 정원 일부를 할애하여 최신 개념의 정원을 수렴해 넣는 것이 두 번째 목표였다. 또한 정원 및 원예 사업체를 유치하여 딕 성이 과거에 속한 곳이 아니라 살아 있는 정원문화의 구심점이 되어 지역의 미래도 함께 책임진다는 다원적 목표를 설정했다.

휴경지 24 헥타르에 딕커 펠트Dycker Feld라는 이름으로 조성된 박람회공원은 혁신적인 콘셉트로 2003년 독일 조경대상을 수상했다 (아래의 별도 설명 참조). 이때 오렌지 궁전 앞의 바로크 양식의 파르테르도 복원되었다.

이로써 딕 성은 바로크로부터 풍경화식 정원, 최신 개념의 정원, 정원문화재단, 도서관, 정원문화 전시장, 원예 센터 등이 공존하는 복합정원문화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위헨은 딕성에 기대어 농사를 짓고 살던 시골마을이었는데 농업이 더 이상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농부들이 농사짓기를 포기하였고 그 결과로 농지가 남아돌게 되었다. 이 농지에 대한 사후 이용문제가 불거졌다. 마을행정책임자들은 정원박람회를 통해 해답을 찾고자 했으며 2002년 라인란트 주 정원박람회 개최지로 인가를 받게 되었다.

해마다 정원이 죽었다 다시 사는 곳

현상공모에 당선된 작품은 획기적이고 설득력 있었다. 스테판 로렌젠이라는 당시 아주 젊은 작가가 약 24 ha 규모의 대상지 전체를 큰 억새밭 (Miscanthus giganteum)으로 만들어 버리자는 안을 들고 나왔다. 본래 농경지 였던 곳이니 억새밭도 밭은 밭이라 볼 수 있다. 억새를 먹을 수는 없지만 소위말하는 에너지 식물이라 규정했다.

억새의 에너지 효율이 그다지 높지 않으므로 실효율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컸다. 그럼에도 잉여사회의 농경지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사례라 볼 수 있다. 억새밭 사이사이에 가로세로 각각 25미터 크기의 소정원 25개소를 설치하여 정원박람회의 본래적인 취지에도 어긋남이 없도록 하였다. 큰억새는 코끼리풀이라고도 하는데 3미터까지 자란다. 봄이 되어 막 싹이 돋기 시작하면 25개의 정원이 모양을 내고 가을이 되어 정원의 시즌이 끝날 무렵이면 제 키로 자란 큰 억새가 정원을 삼켜버린다. 이런 방식으로 역동적인 경관이 연출되었고 더불어 수 톤의 에너지 식물도 수확한다는 콘셉트는 그 이후 지속적으로 모방되고 있다. 정원예술에 큰 획을 그은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위헨의 농경지에서 개최된 지방정원박람회 전경. 스물 다섯 개의 정방형 정원을 큰억새 사이에 숨겨 두어 발견하는 재미가 대단했지만 그 보다는 큰억새를 정원박람회의 주테마로 끌어들인 획기적 아이디어로 정원예술사에 한 획을 긋게 되었다. (사진: Stiftung-Schloss-Dyck) (아래):
큰 억새밭 속에 숨겨진 소정원 (사진: Stiftung-Schloss-Dyck)

정원실무 샘플정원

딕 성에서 가장 특이한 구간. 원예업체, 조경시공업체들을 위한 공간으로서 각 조경업체에서 조성하여 기부한 샘플정원 16개소가 배치되어 있다. 일종의 테마정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정원 작가들에게 디자인을 의뢰하고 시공업체에서 솜씨를 뽐내기 위해 최고의 수준으로 조성하여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작품들을 다수 접할 수 있다. 영국 네셔널 트러스트에서도 찬조 작품을 한 점 조성했다. 

실무 샘플 정원 중 하나. Garden variation. 사진: Jeonghi.Go
샘플정원 <전람회의 그림> 사진: Jeonghi.Go

딕 성 재단 Stiftung Schloss Dyck


딕 성 재단의 정확한 명칭은 “정원예술과 경관문화센터Zentrum für Gartenkunst und Landschaftskultur”다. 정원문화유산, 최신의 문화경관 과제 및 도시를 서로 접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1990년대 딕 성의 상속인 마리 크리스티네 볼프 메테르니히 백작부인이 사회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성을 이용하는 한편 문화유산으로 지속가능하게 보존하겠다는 뜻을 내 보였다(그 이름이 말해 주듯 백작 부인은 여러 채의 성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라인란트 경관연합에서 제안하여 1999년 정원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 백작 부인은 성과 영지를 내 놓았고 지역의 여러 단체 및 지역 은행에서 각각 자본을 내어 재단 기금을 확보했다. 주 정부 역시 기금을 내어 참여했다.

정원박람회 개최가 결정되자 주와 군에서 공동 부담하여 성, 풍경화식 정원, 바로크 정원 등을 철저하게 복원 내지는 보수했다.

딕 성 재단의 핵심 사업은 유럽 정원 네트워크 구축과 정원문화 연구지만 그 외에도 각종 전시회 음악회 등을 개최하며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전시장 설치, 프로젝트 개최 등의 비용은 유럽 연합, 주 문화재청, 연방정부, 연방 문화재청 등 여러 기관과 단체 및 지역 은행의 문화재단에서 십시일반으로 부담하고 있다.

그 외 지역 업체들이 정원문화연구원 설립 기금을 기부했으며 새로 조성된 모던 가든의 관리비도 부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