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entry is part 11 of 11 in the series 베리 공작의 달력

9월 – 소뮈르 성과 포도 수확

베리공작 기도서 중 9월력. ©Photo. R.M.N. / R.-G. OjŽda

9월력은 꽉 찬 느낌이다. 그림 상단을 다 차지하는 거대한 성은 소뮈르 성이라고 한다. 르와르 지방, 낭트와 투르 사이에 위치하는데 지금은 그림에서 보는 것과 조금 다른 모습이다. 1408~1411년 사이에 건설되었는데 1600년경 종교전쟁이 한창일 때 신교도들의 거점이었다. 이 시기에 성 주변에 별모양으로 요새를 쌓아 본래 날씬한 긴 탑들의 하반신이 가려진 형상이 되었다.

루아르 강에서 바라다 보이는 소뮈르 성. 출처: Martin Fabisoner via Wikimedia Commons

앙주 가문의 루이 1세 공작이 베리 공작의 성과 견줄 수 있는 성을 가지고 싶어서 소뮈르에 존재했던 11세기 요새의 터를 이용하여 그 위에 화려하게 지었다.

1480년 앙주 가문이 무너지면서 소뮈르 성은 루이 11세에게 넘어간다. 그 뒤 오래 왕실 소유로 남아 있었다. 그 시기에 한때 베리 공작이 소유했을 수도 있으나 기록이 없다. 베리 공작 소유가 아닌 성을 그린 것은 이례적이다.

후일 앙리 4세가 신교의 지도자 필리페 뒤플레스 모르네 경에게 하사했다. 그러나 정치보다는 종교에 더욱 심취했던 경이 1621년 신교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속세, 즉 성을 버리고 떠나면서 퇴락하기 시작했다.

모르네 경은 종교학자로서 여러 권의 종교서적을 집필했다. 소뮈르 성의 성주라는 직책을 버리고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했으나 2년 뒤 신교 지도자로서의 높은 명성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난다.

그로부터 근 2백년 동안 소뮈르 성은 긴 잠에 빠져있었다.

튼튼한 요새를 지었던 까닭에 1800년대 초반, 나폴레옹 시대에 군사적 목적으로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이후 포로수용소, 감옥 등으로 쓰이는 동안 건물 일부와 탑 몇 개가 붕괴하는 등 크게 훼손되었다.

1906년 소뮈르 시에서 성을 구입하여 복원했으며 지금은 아르 누보 박물관 및 군사 박물관이 들어있다.

성 밖 그림 중앙에 울타리가 쳐진 곳은 기사들이 마상 경기를 열었던 곳이다. 지금은 포도 수확철이 되어 마상 경기가 열리지 않는 듯하다.

베리 공작

Jean Duc de Berry (1340~1416)

장 드 베리(Jean de Valois, duc de Berry 1340-1416)는 프랑스의 왕자였다. 장 2세 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되지 못했다. 샤를5세의 동생, 필리프2세의 형이었다. 만 16세에 오베르뉴, 베리, 푸아투의 영지와 함께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후일 몽팡시에도 그의 영지가 되었다. 만 20세에 영국에 볼모로 갔다가 7년 뒤에 풀려났다.

1380년 형 샤를5세가 서거한 뒤 그의 형과 동생, 앙주공작, 필립공작과 함께 어린 조카 샤를르 5세의 섭정을 맡았다. 이때 장 드 베리 공작은 랑게독의 지휘관이 되었으나 백성들에게 혹독하여 조카의 미움을 샀다. 조카가 성년이 되어 샤를6세로 등극한 뒤 베리공작의 지휘권을 박탈했다. 후일 샤를6세가 정신병에 걸리자 다시 형제들과 함께 섭정하나 큰 권력은 잡지 못한다. 1413년까지 전쟁에 여러 번 참전하고 다시 랑게독의 집정관을 맡았다.

그는 정치적, 군사적 경력을 쌓기보다는 예술과 건축에 관심이 더 많았다. 특히 책을 좋아하여 수많은 필사본을 만들게 했다. 기도서 필사본도 여러권 만들었으나 그중 Très Riches Heures(매우 호화로운 기도서)가 가장 널리 알려졌다. 이 기도서는 베리공작의 소장도서 중에서 가장 중요할 뿐 아니라 프랑스 중세 필사본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1410년 Limburg 화가 삼형제에게 제작을 의뢰했다. 공작은 이 기도서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416년 페스트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Limburg 삼형제도 역병에 걸려 기도서를 완벽하게 끝내지 못한 채 모두 사망했다.

그후 1440년경부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화가가 기도서 제작을 넘겨받아 계속 작업했는데 이 화가가 다름아닌 바르텔레미 데이크Barthélemy d’Eyck라는 주장도 있다. 기도서가 완전히 완성된 것은 1489년으로서 공작의 후손, 사보이 가문의 샤를1세가 장 콜롱브에게 의뢰하여 작업을 마치게 했다. 베리공작이 지은 성과 궁이 도합 17채로 알려졌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많지 않다. 중요한 성은 그의 달력에 모두 묘사되어 있다.

그후 1440년경부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화가가 기도서 제작을 넘겨받아 계속 작업했는데 이 화가가 다름아닌 바르텔레미 데이크Barthélemy d’Eyck라는 주장도 있다. 기도서가 완전히 완성된 것은 1489년으로서 공작의 후손, 사보이 가문의 샤를1세가 장 콜롱브에게 의뢰하여 작업을 마치게 했다. 베리공작이 지은 성과 궁이 도합 17채로 알려졌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많지 않다. 중요한 성은 그의 달력에 모두 묘사되어 있다.

포도 수확

디테일: 포도를 먹는 농부의 표정, 임신한 듯한 아낙 등 매우 생생한 묘사가 돋보인다.

9월은 포도 수확의 달.

그림 하단에 농부들이 포도를 수확하는 장면이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포도주는 당시 누구나 마셨던 일상적 음료였다. 농부들도 물 마시듯 마셨다고 한다. 물은 각종 오물로 더러워져서 마실 수 없었고 우유는 비싸고 주스나 커피, 차 등은 아직 없던 시절이었으며 맥주는 수도원에서 이제 막 빚기 시작했던 시절이었다.

지난 6월 달력의 농부들의 자태가 매우 우아했던 것에 비해 9월의 농부들은 터프하게 묘사되었다. 위의 성과 농부를 그린 필치가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솜씨로 보아 성은 바르텔레미 데이크가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그 반면에 포도밭 장면은 장 콜롱브가 그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바르텔레미 데이크는 앙주 가문의 전속 화가로 일한 적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베리 공작의 기도서가 채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작이 사망하고 그의 유품과 함께 기도서도 앙주로 넘어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때 데이크가 달력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장 콜롱브의 솜씨가 데이크에 훨씬 못 미치지만 그의 생생하고 유머러스한 묘사가 그림에 생동감을 준 것은 사실이다. 둘의 솜씨가 합쳐져 9월 달력은 베리 공작 기도서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 문헌

  1. Raymond Cazelles; Johannes Rathofer, Das Stundenbuch des Duc de Berry. Les très Riches Heures, Faksimilie Verlag Luzern 1998
  2. Eberhard König: Die Belles Heures des Duc de Berry, Sternstunden der Buchkunst, Faksimilie Verlag Luzern 2004

© 3.SPAC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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