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INE플루언서와 우문현답 이어가기

김 아 연 편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조경가. 설치미술가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필기하는 교수 김아연. 오래전 김아연 교수 초청으로 시립대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앞줄에 앉아 정말 열심히 필기하는 김아연 교수를 보고 그 진지한 모습에 웃음이 나왔지만 나 역시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열심히 강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뷰 질문에 답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묻는 사람의 옷깃을 여미게하는 진지하고 심오한 대답을 들었다. 김아연은 한국 조경계 최고봉에 선 설계자 중 한명이며 설계공모의 퀸이고 15년 경력의 교수다. 이렇게 조명을 많이 받는 그를 진플루언서의 손님으로 모실 것인지 잠시 주저했었다. 그러나 그는 <화려함을 추구하지 않고 진정하게 작업하는 사람>이라는 묘사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람이다. 그의 성공은 탐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필사적인 작업의 결과이며 그가 아끼지 않는 다원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가 탐하는 것은 작업 그 자체이고 이를 통해 모든 것의 본질에 도달하는 것이며 본질을 뚫고 나가 세상과 다시 만나는 것이다. 그가 숲을 산책할 때 숲은 그저 서 있지 않고 마침내 속내를 내보인다. 그가 바닥을 내려다보면 바닥은 결국 그에 내재한 문양을 드러낸다. 언젠간 하늘도 비밀을 내보여야 할 듯 하다. 김아연이 조경을 택한 것이 고맙다.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부럽다고 잠시 생각해 봤다. 그러다 선생님보다 더 열심히 하기는 쉽지 않을텐데 학생들이 좀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다음 작품이 몹시 기다려 진다. [고정희]


고정희 우선 인터뷰에 응해 주어 감사하다. 제일 좋아하는 나무가 어떤 건지 궁금하다. 왜 좋은지 설명하면 좋겠지만 굳이 설명 안해도 된다. 말문을 트기 위해 묻는 거니까.

김아연 요리사한테 제일 좋아하는 재료가 어떤 건지 물으면 나처럼 주저하지 않을까. 그때그때 다르고 좋아하는 나무가 너무 많다면 성의없게 들릴테니 하나만 꼽으라면 버드나무라고 하겠다. 늦겨울 바람에 살짝 봄의 온도가 느껴질 때, 이미 버드나무는 땅 속 깊은 곳에서부터 봄을 끌어올려 가장 순진한 연두빛의 신록을 만들기 시작한다. 봄이 시작되는 걸 버드나무에서 느낀다. 초봄의 버드나무숲은 신성하다.

고정희 그말을 듣고보니 봄이 기다려 진다. 김아연은 서울시립대 교수이면서 조경 디자이너로도 왕성히 활동하고 있고 조경계의 중견 인사가 되었다. 오늘은 대학 교수 김아연 보다 조경가, 설계하는 사람, 예술가 김아연과 만나고 싶다. 현재 김아연은 한국 조경계에서 최고봉에 선 설계자 중 한명이며 배정한 교수의 말을 빌면 밀레니엄 세대 조경가들의 롤모델이라고 들었다. 롤모델이라는 위치가 편한 자리는 아닐 것이다. 어떤 느낌인가? 본인에게도 롤모델이 있는가?

김아연 배정한 교수가 그렇게 표현해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닥 “소셜“하지도, “네트워킹“ 에 소질이 많지도 않아 소셜네트워크서비스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에도 둔해졌던 것 같다. 여전히 롤모델이라는 단어는 부담스럽고, 조경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레퍼런스로 여겨진다면 뿌듯할 것 같다.
당연히 나의 성장기(여전히 성장 중)에는 영향을 준 사람들이 많다. 난 그만의 고유한 목소리와 색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고정희 박사님도 그 중 한명이다.

조경이라는 특수성은 새로운 방식의 예술성을 요구한다

고정희 민망. 그렇게 봐 주니 고맙다. 초기에 자리잡느라 어려운 시절도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대학 교수로서의 김아연과 조경가로서의 김아연 둘 다 존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듣기로는 교수가 설계를 겸하지 못하는 풍토였다고 하는데 맞는가? 그런 편견과 어떻게 마주했고 어떻게 대응했는가?

김아연 당시에는 설계사무소와 학교를 병행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고 박사학위가 없는 교수에 대한 편견이 존재했다. 물론 그 상황은 여전하지만, 둘 중 하나가 선택으로 느껴진 적은 없다. 설계 실무는 과학이나 공학자에게 실험이 그러한 것처럼 내게 가장 중요한 실천이다.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던 나는 윗사람의 컨펌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대학에 오니 이러한 보호장치가 사라졌다. 온전히 혼자 내 이름을 걸고 활동해야 하니 두려움과 불안함도 컸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극복하면서 내 목소리를 찾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설계를 계속하는 한 두려움과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라질까봐 두렵고 불안하다. 그때 특별한 대응 전략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젊었고, 열심히 살았다.

고정희 환경과 조경에 연재했던 [그들이 설계하는 법]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그중, “설계는 직업 이전에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자 내가 세상을 꿈꾸는 방식이다. 세상에 대해 겁이 많은 나를 세상과 분리시키면서도 이어주는 나만의 창이다.”라는 말에 크게 공감한다. 아마도 거의 모든 예술가들이 공감할 것으로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설계는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이자 세상에 대처하는 유일무이한 필살기”라고 했다. 이건 김아연 개인적 성취동기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김아연의 작품을 보면 개인의 예술성을 내세우기 보다는 설계 대상에 대한 진진한 애정이 느껴진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작품을 대할 때의 객관성은 어떻게 찾아가는가?

김아연 내가 설계에 매력을 느낀 건 그것이 가진 상상적 측면 때문이었다. 세상 앞의 나는 아주 작은 존재여서 이해할 수 없는 것, 알지 못하는 것, 예측하지 못하는 것, 느끼지 못하는 것들에 좌절한다. 설계는 거대한 세상의 일부를 조각내어 그것을 뜯어보고 이해하고 상상하여 새로운 조각으로 바꾸어 끼는 일일테니, 세상과 나를 연결시키는 그 조각에 대한 애정은 어떻게 보면 생존의 욕망일지도 모르겠다. 조경 작품에서 예술성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다만 조경이라는 특수성은 새로운 방식의 예술성을 요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디자이너 자아의 예술관을 투영하기에 땅이 가지는 본연의 생태적인 힘과 복합적인 사회적 이슈, 나아가 불특정 다수의 이용자라는 공공적 성격 등은 타 예술분야와 구별되는 새로운 창의성을 요구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설계안이 난도질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을 뚫고 나가는 힘이 예술성과 객관성의 균형, 창의성과 공감대의 균형이 아닐까 생각한다.

생태학적 상상력

생태학의 원리들을 과학적 원리에 그치지 않고 실제 프로젝트에서 구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그것을 포기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

고정희 설계를 하려면 소설적 상상력, 조형적 상상력, 기술적 상상력 그리고 생태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그중 생태학적 상상력이 새롭다. 무슨 뜻이며 이는 김아연 혼자만의 철학인가 아니면 한국의 조경인들이 공유하는 개념인가.

김아연 수년전부터 강연 기회나 원고, 혹은 인터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복적으로 쓰고 있는 말이다. 처음 시작은 건축학과 학생들에게 조경의 특수성을 설명하면서 인 것 같다. 조경에서의 공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복잡한 수많은 관계망을 포함하는 것이어서, 이 공간에서 발생하는 변화(설계의 결과)가 미치는 영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따라서 건축가뿐만 아니라 공간환경을 다루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하나의 복합생태계로서 바라보고 건축물이 속한 복합적인 사회-자연의 그물망을 통합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설득하기 위해 생태학의 주요 아이디어를 소개하면서 ‘생태학적 상상력’이라는 표현을 썼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인과관계에 대한 상상력이 커질 수록 설계가는 사회와 지구에 대해 책임감있는 설계안을 고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당연시 여기던 생태학의 원리들을 과학적 원리에 그치지 않고 실제 프로젝트에서 구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그것을 포기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당연 나만의 철학이 아니고, 조경전문가라면 누구나 이러한 생태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중시 여긴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다. 생태학적 상상력을 강조하는 일은 철학이라기 보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다.

고정희 이제 김아연과 숲의 관계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다. 2008년 명일동 우리동네숲, 청량리 우리동네 숲 밥퍼, 2011년 광주 디자인 비에날레의 Listening Forest, 2013년 김해 클레이아크 미술관 기획전의 우리마을숲, 그리고 2019년 녹사평역 지하예술정원의 숲 갤러기에 이르기까지 숲 작품을 많이 했다. 특히 조경작품보다 설치미술 작업에서 숲과의 진정한 관계가 드러나는 것 같다. 왜 그리 숲에 연연하는가?

김아연 아마도 숲을 너무 좋아하지만 잘 몰라서 그럴 것이다. 좋은 숲에서 느끼는 감동을 도면으로 옮기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다. 아직도 잘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계속 공부를 하고 싶은데, 그러한 탐구의 기회가 몇 개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 주목하지 않았던 오래된 가치들을 같이 발견해주는 일

고정희 2013년 김해 클레이아크 기획전의 우리마을숲은 그림자극처럼 연출했다. 숲이 우리 곁에서 서서히 멀어져 아련히 그림자로 남았다가 아주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조차 느껴졌다. 극한 아름다움이 주는 두려움과 겹쳐 인상이 매우 강했다. 그런 반응을 얻고자 했나? 어떤 의도로 만든 작품인가?

김아연 정확히 읽었다. 김해의 진례라는 동네가 산업화되면서 마을의 오래된 나무와 숲들이 사라지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바라봐주지 않으면 개발 논리에 밀려 사라지는 나무. 전시장에서 작품 가까이 가지 않으면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다가가면 조명 센서가 작동해서 나무는 비로소 하나의 존재로 모습을 드러낸다. 나무와 마주선 나. 그것들의 집합으로서의 숲. 아마도 그런 관계성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고정희 그림자만 아련히 남은 우리 마을의 나무를 보고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궁금하다. 피드백이 있었는가? 모니터링을 하는가?

김아연 몇 개월 전시하고 철거되는 기획전시여서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 마을의 이야기와 나무가 이렇게 미술관에서 다룰 만큼 중요했구나라고 얘기하며 기뻐하셨다고 들었다. 시골 마을은 젊은이들이 없어, 수많은 마을의 이야기와 전설들이 사라질 위기에 있다. 활자로 기록되지 않고 구술로 전수되어 왔기 때문이다. 마을분들께 오랜기간 전해 내려온 나무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과정이 결과물 만큼이나 중요했다. 지역에서 작업한다는 것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 주목하지 않았던 오래된 가치들을 같이 발견해주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고정희 녹사평역 숲 갤러리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나무의 속살을 고스란히 내 보였다. 그럼에도 진짜 숲보다 더 숲처럼 느껴졌다. 나무와 숲에 관해 부단히 연구한 뒤에나 태어날 수 있는 작품인 것 같다. 속살을 내 보인 것은 지하 공간이라는 한계 때문인가? 아니면 속을 다 드러내 보일 정도로 숲과 친해졌는가? 숲 연구에 관해서도 듣고 싶다.

김아연 숲 연구라고 하니 부끄러운데…생태학자들이 숲에서 방형구를 떠서 전수 조사를 하는 과정은 내게 늘 중요한 영감을 준다. 숲의 질서를 설계의 언어인 도면으로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숲을 대규모 지하공간에 만드는 작업은 위험하기까지 한 발상이었는데, 개장하는 날까지 마음을 졸였다. 아마도 무모한 작업을 밀어붙였던 이유는 숲에서 느끼는 감동의 원인 중 하나가 숲의 건축적 구조, 즉 나무들의 수직성과 나무들의 규격과 밀도에서 비롯되는 공간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속살이라고 표현한 목재 기둥 그 자체로도 숲의 공간감을 표현할 수 있다고, 그 믿음이 틀리지 않기를 개장때까지 내내 마음을 졸이며 기원했다.

고정희 그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설치미술과는 달리 조경작품에서는 숲 콘셉트로 크게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2015년 세운상가 리모델링 공모전에 제출한 Forest Walk가 고배를 마셨다. 그때 광활한 텅 빈 광장을 설계한 작품이 당선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한국의 도시정서가 아직 광장콤플랙스를 극복하지 못한 때문인가? 어번 포레스트 워크는 시기상조였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녹사평역 숲갤러리. 걸작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 김아연
녹사평역 숲갤러리 디테일. © 김아연

건물과 숲의 새로운 하이브리드를 꿈꿨던 것

김아연 그래도 가작을 했으니, 아주 고배는 아닌데… . 설계사무소 다닐 때 대형건축사사무소와 같이하는 복합개발 마스터플랜 작업에서 광장에 나무를 심었다가 설계의 기본도 안되어 있는 사람으로 치부된 적이 있다. 포장면이 크니 뙤악볕에 그늘을 주고 싶었다고 설명해도, 광장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한다고 건축사사무소 대표가 몰아 부쳤다. 그 사건은 인간적인 모멸감 외에도 내게 큰 의구심을 안겨주었는데, 예를 들어, 왜 광장에는 나무를 심으면 안되지? 광장이라는 공간의 본질은 무엇이라서 나무는 안되지? 이러한 질문들이다. 그 이후 어떤 공간 유형(남기준 편에 ‘장르‘라고 표현된)의 본질에 대해 습관적으로 묻는다. 또 다시 모멸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말이다! 스스로 광장은 이래야된다, 공원은 이래야된다는 도그마에 갖혀 있지 않은가를 묻게된다. 최근 ‘공원은 무릇 이래야 된다‘라는 심사평이 주도하는 설계공모에 참가해서 똑 떨어졌다. 순위가 아쉬운게 아니라, ‘공원은 이래도 되는가‘라는 쟁점이 사라진 설계공모를 위해 고민했던 시간이 덧없게 느껴졌다. 창의적인 결과물은 익숙한 질서를 대상화해야만 가능하다.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아마도 세운상가라는 거대 스케일의 선형 건축믈의 유산적 무게감에 도심을 가로지르는 연결 녹지축의 잠재력과 숲의 서정성을 보태고 싶었을 것이다. 건물과 숲의 새로운 하이브리드를 꿈꿨던 것 같다.

고정희 공원이 무릇 어때야 하는지 궁금해 진다. 최근 기후위기와 관련하여 나무심기, 숲만들기로 아주 난리가 났다. 5년전 김아연의 포레스트 워크는 결국 시대를 앞질렀었나?

김아연 숲의 중요성이 대중적 공감을 얻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지만, 숲이 디자인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어 슬프다. 새롭게 조성되는 도시공간에서 감동적이고 창의적인 숲을 만나기는 어렵다. 숲에 대해서도 뿌리깊은 편견이 있고, 나를 포함하여 전문가들도 아직 그 편견을 벗어날 해법을 잘 찾아낸 것 같지 않다.

고정희 숲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일지도 모른다. 테마를 바꾸겠다. 여성 전문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 정도는 패미니즘에 관해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안다. 그와 관련하여 어떤 인터뷰에서 “버지니아 대학의 엘리자베스 마이어Elizabeth Meyer의 어느 글이 나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고 했는데 그 어느 글이 어떤 글이었는지 궁금하다. 얘기해 줄 수 있나?

김아연 내가 학교를 다닐때만 해도 남학생들이 대다수였고, 여자 교수님은 없었다. 페니미즘에 대한 관심은 사상적이고 철학적인 관심이기보다 여자라면 다르게 접근했을까?라는 단순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선머슴같았지만 그래도 여학생이다보니 여성적 감수성이 이 분야에서 존중될 수 있는지가 궁금하지 않았겠나. 하지만 당시 조경과 여성을 접목하는 일은 발언조차 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대학원 시절, 조경의 타자성을 설명하는Meyer의 글 “The Expanded Field of Landscape Architecture“ 에서 여성적 시선과 접근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조경계에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당당하게 선언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벅찼다. 한달 넘게 서툰 영어를 다듬어 그때의 감정을 이메일로 전했고, 기대를 뛰어넘는 답장을 받았다. 그렇게 유학에 대한 꿈이 생겨났다.

고정희 마이어의 글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 2020년 코로나 상황에도 불구하고 왕성히 활동했다. 서울숲 공원아카이브전, “시민의 숲을 기록하다” 전시 감독을 맡았고 THE H 포레센트 헤리티지가든에 초청되어 MEADOW CARPET을 출품했다. 포레센트는 무슨 뜻이며 Meadow Carpet은 어떤 작품인가. 왜 meadow를 선택했나? 숲은 이제 버렸나?

김아연 하하. 어떻게 감히 무언가를 버릴 수가 있겠는가. 숲에 대한 탐구를 평생의 과제로 여기고 있기는 하지만, 항상 숲을 들이대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탐구의 주제는 조경의 수평성에 대한 것이다. 수평성에 대한 관심은 공간에서 수평선이 가지는 힘을 구현하는 방법과 공간 바닥면의 미학을 끌어올리는 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수평적인 자연경관, 호수, 초지, 바다, 들판 등에 관심이 많다. (포레센트는 아파트 브랜드 이름이며, 안타깝게도 실제 아파트에 포레스트의 속성은 없다.) Meadow Carpet은 최근 몇 년 동안 작업하는 일련의 카펫과 초지 시리즈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 카펫은 최근 내가 주목하고 있는 중요한 수평적 공간 만들기 전략 중 하나이다. 올해 열릴 베니스 건축비엔날레에 “Black Meadow“라는 작품이 소개될 예정인데, 생명이 사라진(black)초지(meadow)가 비엔날레의 주제인 함께 살기와 지구적 위기인 감염병과 기후변화 등을 논의하는 공간적 바탕으로 쓰이길 바랬다. Black Meadow를 만들면서 바닥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새삼 깨달았다. 실내공간에 초지를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자연스럽게 카펫이라는 공간적 장치를 떠올리게 되었다. 올해 덕수궁에서 열리는 야외 프로젝트(설치미술전)에도 이러한 탐색의 결과가 또 한번 소개될 것 같다.

김아연 카펫과 초지 연작 중 “meadow carpet”. © 김아연

내가 아닌 나로 확장하는 상상의 활동, 정말 설레는 일

고정희 새록새록 더욱 흥미로워진다. 2018년 가을 덕수궁에 갔을 때 외부공간의 업그레이드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꼈었는데 이번 설치미술전이 원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 덕수궁 앞에서 데모만 하지 말고 정원도 좀 기웃거리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그건 그렇고 대학교수와 설계가 중 어느 쪽이 본인의 본질에 더 가깝다고 보는가?

김아연 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면 당장 은퇴해도 될 것 같은데…하하. 이미 두개가 똘똘 하나로 뭉쳐버렸다. 둘이 싸우지만 서로 보완하며 교정한다. 오히려 설계작업에서는 교수로서의 직업인이 아니라 자연인으로서의 내가 훨씬 큰 역할을 한다. 설계하는 동안만큼은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어린이로 변하고,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로 변하고, 실연당한 청년으로 변하고, 학원가기 싫은 청소년으로 변한다. 내가 아닌 나로 확장하는 이러한 상상의 활동이 은밀하게 전개된다. 나무 심볼 하나를 그리면서 그 나무 그늘 아래에서 펼쳐질 수많은 또 다른 나의 이야기들을 상상해보라. 정말 설레는 일이다.

고정희 그 설레임을 평생 간직하기 바란다. 올해 5월, 베니스에서 개최되는 건축 비에날레에 참가한다고 들었다. 베니스 건축 비에날레라면 디자이너에게 Crème de la Crème이다. 이제 정상에 오른 것으로 보아도 될까?

김아연 학생들은 설계를 처음 시작할 때 느끼는 공포에 가까운 어려움을 곧잘 토로하곤 한다. 그들을 달래기 위한 말이 아니라, 나 역시 아직도 모든 설계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린다고 얘기해준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오랜 경험을 통해,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다양한 방법과 두려움의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요령이 생겼을 뿐이라고. 창작하는 자에게 정상이 있을까. 한 고개를 넘으면 또 넘어야 되는 고개들, 올라야 할 수많은 정상들의 연속일 것이다. 다만 나중에 돌이켜봤을 때, 그러한 작은 고개들이 큰 산맥의 일부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많이 기쁠 것 같다. 그러한 의미에서 내가 서있는 지금을 되돌아보게 해 준 고정희 박사님의 질문들에 감사드린다.

고정희 두서없는 우문이 도움이 되었더니 천만다행이다. 주옥같은 대화 너무 감사하다. 다음엔 교수 김아연과 만나려 했는데 예술가 김아연과 또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가 무궁무진할 것 같다.


김아연 교수님 좋은 시간 감사드립니다.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를 졸업했다. 엘리자베스 마이어 교수와의 인연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 대학 건축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Stephen Stimson Associates Landscape Architects에서 Senior landscape designer로 일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가원조경, 디자인 로직에서 설계가로 일하던 중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의 부름을 받았다. 지금까지 15년째 교수로서 수많은 후학들을 길러내는 한편 창작생활을 꾸준히 잇는 과정에서 설계공모를 휩쓸고 있다. 김아연을 일부러 떨어뜨린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걸출하면서도 나무심볼을 그릴 때면 그 아래서 펼쳐질 이야기를 상상하면서 오늘도 마음 설레하는 순수한 창작인이다.


© 3.SPACE MAGAZINE/진플루언서와 우문현답 이어가기/김아연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