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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공작의 달력 – 3월

3월 달력 역시 어김없이 성을 배경에 두고 전면에 농사짓는 장면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 성에 얽힌 사연이 많기 때문에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봄농사에 분주한 농부들을 먼저 만나보는 것이 예의일 것 같다.

농가3월령

양지바른 언덕에서 농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2월에 쌓였던 눈이 다 녹아 촉촉해진 땅에 파릇파릇 풀이 돋기 시작한다. 마침내 양떼가 다시 풀밭으로 나왔다. 그러나 아직 이른 시기여서 배불리 뜯을 수 있을만큼 풀이 자라지 않은 것 같다. 목동이 양을 먹이기 위해 커다란 짚더미를 나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중앙에는 흰담으로 두른 포도밭이 두 군데 있는데 한 곳에서 포도나무를 자르는 정원사들의 바쁜 손놀림이 보이는 듯하다. 그 아래 넓은 밭에서 황소 두 마리가 쟁기를 끌며 밭고랑을 내고 있는데 그 오른에서는 농부가 씨뿌릴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15세기 쟁기는 이미 바퀴가 달려있어 밭갈이가 조금은 수월해 보인다.

©Photo. R.M.N. / R.-G. Ojzda

흰 탑의 정체

그런데 길이 교차하는 곳에 흰탑이 하나 보인다. 밭과 밭 사이에 어쩐 일로 저런 고급진 탑을 세웠을까. 이 탑의 유래,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유형의 탑에 관해 설명이 약간 필요할 것 같다. 그 의미로 보아 작은 승전비라고나 해야 옳겠다. 카롤루스 대제 대에 유래했다고도 하고 십자군전쟁의 유물이라고도 하며 루이 6세 시대에 나타났다고도 전해진다. 이 세가지 사건의 공통점은 물론 전쟁이다. 유럽의 판도를 평정한 카롤루스 대제는 평생을 전장에서 누비면서 처음엔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돌무더기를 쌓았다고 한다. 십자군 전쟁 때 애꿎은 남의 나라 수도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하늘나라를 이제 우리가 차지했다고 좋아했으니 본국으로 돌아 와 조금 더 그럴싸한 승전비를 세웠을 것이다.

루이 6세는 왕위를 물려받기는 했으나 주변국은 물론 프랑스 영주들조차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과 수없는 전쟁을 치르며 수도를 파리로 옮기고 거기서 생드니 성당까지 이르는 길목에 승전비를 줄줄이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승전비의 형상이 교회탑의 미니어처를 연상케 하는데 그 역시 이유가 있다. 루이6세는 생드니 주교의 전적인 지지를 받았었다. “프랑스 왕은 최후의 심판의 왕이며 모든 인류의 왕이다”라는 구호를 만들고 더 나아가 “왕은 신의 부름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과 직접 통한다”는 등의 주장을 했다. 왕실과 교회가 하나로 융합되는 순간이었고 그렇게 하여 프랑스 왕이 권위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탑 형상을 본 뜬 승전비를 지어 하늘이 내려준 왕권이며 하늘이 내려 준 승리라는 것을 과시했다.

베리 공작의 기도서 3월의 배경을 이루는 뤼지냥 성Château de Lusignan은 파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서쪽 비엔주에 있었다. 뤼지냥 가문에서 12세기에 지은 성인데 지금은 폐허만 남아 있지만 축조 당시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성이었다고 한다. 이 가문 출신으로서 아주 유명한 인물이 있다. 기 드 뤼지냥 공작인데 2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여 예루살렘에 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 십자군 왕국의 왕이 되었다. 예루살렘 십자군 왕국이 무너진 뒤 다시 쫓겨다니다가 키프로스 왕국을 세워 창업군주가 된다.

그쯤 되었으니 성으로 가는 길목에 당연히 승전비를 세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승전비는 루이 6세의 승전비가 아니라 십자군 전쟁의 승전비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뤼지냥 성의 운명은 어둠에 묻혔다가 15세기 베리 공작의 기도서에 나타난 것이다. 성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였던 베리 공작이 가장 사랑한 성이어서 여기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멜뤼진 전설

뤼지냥 성. 오른쪽 탑위를 날아가는 용에 얽힌 전설이 있다. ©Photo. R.M.N. / R.-G. Ojzda

뤼지냥 성에 얽힌 이야기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기다란 성벽을 허리띠 처럼 감고 있는 성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탑 세개가 우뚝 서 있다. 왼쪽의 탑은 감시탑, 중앙의 탑은 시계탑인데 이 시계탑과 가장 오른쪽 탑 사이의 파란 지붕 건물들이 바로 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붉은 원뿔지붕을 이고 있는 오른쪽 탑에 으스스한 전설이 스며있다. 탑위를 날아가고 있는 용에 얽힌 전설이다.

성이 지어지기 전, 아주 옛날에 멜뤼진이라는 이름의 물의 요정이 있었다. 요정이니 물론 아름다웠지만 불행하게도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이면 하반신이 뱀처럼 변했다. 뤼지냥 가문을 일으킨 레이몬딘이 그 사실을 모른 채 멜뤼진에게 반해 청혼을 하는데 멜뤼진은 토요일엔 절대로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은 뒤에 응했다. 요정의 신비한 힘의 도움을 받아 레이몬딘은 전쟁에서 승승장구, 명예와 재물을 얻어 모두 얻고 일대에서 제일 큰 성을 지었다. 아들 열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는데 아들들이 모두 신체에 조금씩 이상이 있었다. 간신이 한 명 있어서 레이몬딘 성주에게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지, 혹시 아들들이 불륜의 씨앗이 아닌지, 멜뤼진이 토요일마다 대체 무엇을 하기에 거처에서 나오지 않는지 등등 의심의 씨앗을 불어넣었다. 어느 토요일, 레이몬딘은 더 참지 못하고 아내의 욕실을 엿보았다. 목욕하는 아내의 하반신이 뱀의 형상이라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를 들은 아내는 노여움을 견디지 못하여 용이 되어 하늘을 날아 사라졌다고 한다. 그때 한에 맺힌 괴성을 지르며 날아갔는데 이후 성주는 재물도 잃고 전쟁에서 패배하는 등 비운이 거듭 만났다. 뤼지냥 성에 비극이 발생할 때마다 한에 맺힌 용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고 전해진다.

© 고정희 2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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