켐프텐 수도원장 왈

켐프텐Kempten 은 독일 거의 최남단, 알프스 산기슭에 위치한 소도시인데 예전엔 수도원장이 제후로서 군림했던 고장이었다. 말하자면 성직제후령이었다. 18세기 초에 이르러 베르사이유에 대한 소문이 이곳 깊은 산 속까지 들려왔던 모양이다. 당시 수도원장이었던 안젤름 라이힐린 폰 멜덱은 <우리도 루이 14세 처럼 한 번 살아봐야지>라며 그렇지 않아도 화려한 자신의 <레지덴츠>의 남쪽 날개 건물을 개조하여 서재 →침실→거실→알현실→객실을 일자로 주욱 연결시키고 베르사이유 궁전 못지 않게 꾸몄다. 다만 실내만 베르사이유를 따랐을 뿐 그 유명한 정원은 모방하지 못했다. 뒤에서 설명하게 되겠지만 보유하고 있던 토지가 너무 작아서 대정원을 만들 여지도 없었고 실내를 화려하게 꾸미느라 빚을 져 재정적 여력도 없었다.

레지덴츠란

가톨릭 지방에 가면 켐프텐처럼 수도원장이나 주교가 통치했던 도시가 드물지 않은데 이는 이들이 성직자이기 이전에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수도원장은 수도원후라고 불렀다. 신성로마황제로부터 후작의 작위를 받아 신분상승하고 봉토를 하사받아 그 지역의 통치권을 갖게 된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도시를 <수도원 도시>라고 한다. 이때 수도원이 곧 정부청사였으며 사제들이 공무원이었다. 수도원후의 집무실, 관사, 사제들의 거처, 학교, 관청, 문화시설, 의료기관 등의 복합적 기능을 가졌으므로 수도원의 규모도 컸다. 이런 수도원을 <레지덴츠>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냥 입장료 내고 쑥 들어가서 관람할 수 있는 곳은 아니어서 한 시간에 한 번 전속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안내자의 말을 빌면 베르사이유보다 이곳이 더 낫단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선 사람들에게 떠밀려 아무 것도 보지 못하지만 여긴 방문객이 많지 않으니 낱낱이 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날 그 시각에 온 방문객이 우리 포함 열 명이 못 되었으므로 천정화와 벽화의 모티브 하나하나 아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캠프텐 레지덴츠의 화려한 거실. 다섯 개의 방 문을 일자의 축으로 연결하여 한 눈에 보이게 하는 방식을 썼다. © JHG
<수도원 도시>의 본부였던 레지덴츠 외관. 전형적인 바로크 궁전 양식으로 지었다. 현재 법원에서 일부 공간을 쓰고 있다. © JHG
레지덴츠와 연결된 가톨릭 성당 성 로렌츠 바실리카. 겨울이라 공사 중이어서 남의 사진을 빌렸다.
© CC BY-SA 3.0.d / Hilamont

켐프텐 가는 길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접근하는 가에 따라 한 도시에 대한 첫 인상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켐프텐의 경우 우리 같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겐 썩 친절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기차에서 내려 보니 일단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 막막했다. 버스가 있기는 한데 일요일이어서 한 시간에 한 번 운행한단다. 왜 일요일엔 운행 간격이 더 뜸한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모든 걸 다 이해할 수는 없는 일. 시간을 보니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두리번거렸으나 택시도 없다! 어쩌란 건가. 캠프텐은 바이에른 주에 속한 도시, 말하자면 자동차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위한 도시다. 명목상 기차를 운행하기는 하나 기차에서 내려서 시내에 어떻게 들어갈지 그건 우리가 알바 아니다. 알아서 해라. 뭐 이쯤 되는 듯했다.

가기 전에 지도를 미리 살펴보았었다. 일러라는 이름의 강이 도시를 남북으로 가르고 지나가는데 강변 산책로를 따라가면 시내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디에도 강변산책로로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이질 않는다. 이렇게 아무 것도 없는 기차역은 처음 보았다. 택시도 없고 삭막한 기차역에서 30분 이상을 기다리기엔 지루할 것 같아 <시내로 가는 길>이라는 화살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 화살표는 방문객을 일부러 외곽의 추하고 시끄러운 거리를 따라 안내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행자를 위한 화살표가 아니라 자동차를 위한 화살표였으니까.

캠프턴을 찾은 이유는 이 도시에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 된 도시 중 하나라는 점이며 두 번째는 이곳이 보기 드문 <더블시티>라는 점이다. 캠프텐은 트리어, 아우구스부르크 등과 함께 고대 로마인들이 라인 강 서쪽의 게르마니아를 정복하면서 세운 도시 중 하나였다. 다만 트리어와는 달리 시내에 고대 도시의 유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중세의 흔적도 죄다 사라지고 없다. 그 대신 바로크 이후에 세워진 근세 도시의 외관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점이 썩 와 닿지 않는 곳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 외곽에 있는 고대 유적지 발굴을 완료했으며 건물 몇 채를 복원하여 유적지 공원을 만든 것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더니 문이 닫혀 그냥 돌아서야 했다.

여러모로 첫 인상이 좋은 도시는 아니었다.

고대 유적지 공원에 헤라클레스 신전을 복원해 놓았다. 문이 닫혀 남의 사진을 빌렸다.
© CC BY 3.0 de / Alofok

더블시티

더블시티란 무슨 뜻이냐 하면 도시의 반은 성직제후령, 즉 수도원 도시였고 반은 시민들(상공인들)이 자치권을 가진 제국령이어서 성격이 판이한 두 도시가 공존했던 곳을 말한다. 중세 초기에는 성직제후가 홀로 통치했었는데 이때는 농부들이 피지배층의 전부를 이루었었다. 후일 상공업이 점차 발달하며 13세기 경에 상공인들의 세력이 커졌다. 그들은 재정난에 허덕이는 수도원후에게 영지의 반을 사들인 후 황제로 부터 자치권을 인가받았다. 상공인들이 도시를 세우고 이제 시민citizen 이 된 것이다. 세금을 황제에게 직접 내고 전쟁이 벌어지면 군대를 소집하여 참여한다는 조건이었다. 황제로서도 수입을 높이고 높은 귀족들을 견제하는 좋은 수단이었으므로 도시 자치권을 자주 발행했다. 이런 도시를 제국령 도시Reichsstadt라고 한다. 13세기에 이런 도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개는 수도원 도시 아니면 제국령 도시로 성격이 확실히 구분되는데 이렇게 두 도시가 한 곳에서 공존한 케이스는 그리 많지 않다.

제국령 도시는 명목상 황제 치하에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시민들이 자치권을 행사하여 도시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다. 시민들의 집, 즉 시청을 짓고 거기서 시민 대표들이 도시의 살림을 직접 꾸렸으며 시민들이 건설한 성당에서 예배도 보았다. 또한 튼튼한 성벽을 쌓아 수비를 꾀하는 한편 수도원 도시와 확연히 구분했다. 양도시 사이에 갈등이 분분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시민들의 도시는 후일 신교로 개종했으므로 분쟁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수도원 도시와 농민전쟁

수도원의 지배를 받던 농민들이 종교개혁에 힘입어 봉기한 사건은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1520년경 현 남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지를 뒤흔들었던 농민 전쟁의 중심에 캠프텐도 있었다. 농민들이 봉기한 까닭이나 봉기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결국 수만 명의 농부들이 잔인하게 학살 당하거나 처형당했다. 이후 상황이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세금만 올랐다. 이어 페스트가 여러 차례 지나갔고 30년 전쟁이 일어났으니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30년 전쟁으로 두 도시가 절단났지만 수도원도시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레지덴츠 건물과 성당복원 공사에 들어갔다. 이때 중세의 모습을 재현하지 않고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했다. 수도원을 이렇게 ㅁ자 두 개를 붙여 日자 모양으로 지은 것으로는 최초였다고 한다. 이후 캠프텐 수도원은  바로크 시대의 수도원 건축 양식으로 자주 모방되었다.

캠프텐의 레지덴츠. ㅁ자 건물 둘을 붙인 형상으로 길이 145미터 폭 43미터 규모. 정원은 비교적 작은 편으로 노단식으로 조성하고 사진에선 보이지 않지만 오른쪽 테라스가 끝나는 곳에 웅장한 규모의 오렌지 궁전을 별도로 지었다. 궁전과 붙어 있는 탑 세 개짜리 교회가 성 로렌츠 대성당.
© CC BY 3.0 de / Ralf Lienert

시민들의 도시 – 기꺼이 치른 자유의 대가

시민들의 도시는 농민전쟁으로 오히려 이득을 보았다. 1525년 성난 농민들의 쟁기와 낫을 피해 수도원후가 하필 시민들의 도시로 피난을 갔다. 당시 수도원후는 아직 시민들의 도시에 대한 권리를 일부 보유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수도원후에게 피신처를 기꺼이 제공했다. 그리고 이를 나머지 권리도 모조리 사들이는 기회로 삼았다. 수도원후를 연금조치하고 문서에 서명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수도원후는 엄청난 금액을 받고 자신의 통치권을 모두 양도했다. 캠프텐의 반쪽, 시민들의 도시는 이제 수도원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이다. 이 금액을 지불하기 위해 세금을 더 걷고 교회의 보물을 매각해야 했음에도 기꺼이 자유의 대가를 치렀다고 한다.

이렇게 무리해서라도 통치권을 모두 양도받은 까닭은 무엇보다도 신교로 개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카톨릭의 입김이 조금도 닿아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이 지배적인 남부 독일에서 캠프텐의 미니 신교 도시는 마치 큰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조각배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버텨낸 것을 보면 이곳 상공인들의 강단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 같다.

1802년 세력이 커진 바이에른 왕국이 양도시를 모두 흡수하여 바이에른 왕국의 영토로 영입했다. 이로써 캠프텐의 두 도시 역사는 종지부를 찍었고 지금은 바이에른 주에 속한 도시 캠프텐이 되었다.

오늘의 캠프텐

당시 보여주었던 캠프텐 시민들의 저력은 지금도 살아 있는 듯하다. 변변한 지하자원도 없고 주변의 산골마을과는 달리 스키휴양지로도 적절치 않으며 그럼에도 산간에 위치하기 때문에 큰산업체를 유치할 수 있는 입지가 아니다. 그러나 캠프텐은 현재 독일 평균을 넘는 경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일찌감치 <수출 위주의 중소기업>만이 유일한 기회 임을 파악하고 이에 집중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와 병행하여 대학에 투자하여 교육 수준을 높였다. 그 덕에 중소기업들이 캠프텐 대학 출신의 고급 인력을 흡수하기 위해 이곳에 회사를 차린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녹지가 부족한 도시 외곽이나 자동차 위주의 도시계획이 다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캠프텐을 떠날 때는 강변 산책로를 제대로 찾아 기차역까지 걸어 갔다. 역에 도착해 보니 가는 길에 산책로를 찾지 못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역사 뒤쪽으로 가는 터널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시민들의 집, 현 시청. © JHG
시민들이 세운 신교 교회. 장크트 망 St. Mang. © JHG
장크트 망 교회를 중심으로 배치된 부유한 상인들의 집. 광장 한 복판에 예전에는 예배당이 한 채 더 서 있었다. 30년 전쟁 때 예배당이 파괴된 뒤에 다시 복원하지 않고 그 옆에 장크트 망 교회를 크게 지었다. 구 예배당 자리는 시민들이 와인바와 와인 저장고로 썼다. © JHG
옛날 두 도시를 가르던 성벽이 있던 자리에 뒤늦게 1902년 계단형 테라스를 조성하여 한때 양분된 도시였음을 표시했다. 계단을 올라 오른 쪽 건물 사이로 들어 가면 성직제후가 지배했던 수도원 도시가 나온다. © JHG
강변 한 쪽은 산책로, 그 맞은 편은 강변 도시. © JHG

© 써드스페이스 블로거진 / 도시이야기 /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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