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entry is part 3 of 5 in the series 크리스토와 잔끌로드

크리스토와 잔끌로드 3 – 뉴욕 뉴욕

파리에서 뉴욕으로

1962년 늦가을에 크리스토와 잔끌로드는 결혼한다. 그리고 뉴욕으로 이민갈 계획을 짠다. 그들은 미국으로 이민한 것이 아니라 <뉴욕>으로 이민했음을 강조한다. 그들의 ‘어처구니 없는’ 아이디어를 구현하기에 빡빡한 유럽보다는 신세계 중에서도 가장 흥분되는 도시, 뉴욕이 적절한 곳이라 여겼다. 불가리아 사람이었던 크리스토는 프랑스어 실력이 부족하여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만한 파리지엔들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크리스토는 뉴욕은 어차피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도시이기 때문에 엉터리 영어를 한다고 해도 아무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처음엔 관광비자를 가지고 뉴욕에 갔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되돌아 가려고 왕복 항공권을 끊었다. 결국 눌러앉아 1967년엔 그린카드도 얻고 크리스토는 여러 갤러리에서 전시회도 열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엔 쉽지 않았다. 영어가 서툴어 힘들었고 비자도 없고 빚만 잔뜩 진 상태에 살 집도 없어 힘들었다. 그러다 허름한 건물을 얻어 여러 달에 걸쳐 수리하느라 빚은 더 커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포장 실험은 계속되었다. 상점 입면을 정성들여 완성하고 나서 이를 다시 포장하는 작업으로 뉴욕에서의 작품 생활을 시작했다. 

1966년

미네아폴리스 – 1,200m3의 “패키지”

그리고 드디어 대형 작품이 탄생했다. 

미네아폴리스 예술 학교 앞에 대형 기구를 만들어 띄웠다. 총 부피는 1,200m3. 예술 학교 학생들 147명이 작업을 도왔다. 미군에서 고공 실험할 때 쓰는 기구 4개를 구했다. 이 기구의 높이는 5.5m, 직경이 7.6m. 각 기구 안에는 지름 약 70cm 짜리 풍선  2,800개가 들어 있었다. 4개의 기구를 연결하고 이를 다시 포장했다. 결국 2,800개의 풍선 덕에 뜬 것인데 이를 포장한 것을 다시 포장한 것이다. 이들은 이 작품을 패키지라고 불렀다. 공기(수소와 헬륨)를 포장한 셈이니 패키지가 맞다. 

이 무렵 독일 카셀에서 국제 예술제 <도쿠멘타Dokumenta> 개최위원회로 부터 연락이 왔다.  크리스토와 잔끌로드를 초대한 것이다. 국제무대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미네아폴리스에서 실험한 패키지 아이디어를 가지고 독일로 향했다. 

1966년 미국 미네아폴리스  “패키지” . 실크스크린. 사진 작가 불명.

1968

카셀 – 5,600 m3의 “소시지”

카셀에서는 아주 기다란 풍선을 만들어 띄웠다. 카셀 사람들은 이를 소시지라 불렀다. 총 부피 5,600m3. 미네아폴리스 패키지보다 부피가 월등 커졌다. 사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구였다. 다시 풍선 안에 풍선이 있는 구조를 썼다. 내부의 풍선에 헬륨을 넣어 뜨게 하고 외피를 폴리에틸렌으로 입혔다. 그런데 카셀에 바람이 너무 불어 외피가 터지고 말았다. 여러 차례 수선을 시도해 보다가 결국 외피를 트레비라라는 매우 강력한 소재로 완전히 다시 만들어 성공했다. 

이 패키지는 카셀 잔디밭을 두달 동안 장식했다. 모두 7만 달러의 비용이 들었다. 작품을 제작하고 설치하다 실패하여 다시 제작해서 마침내 성공하는 전 과정을 촬영하여 작품집을 냈다. 그들의 작품집은 늘 불티나듯 팔렸다. 아쉽게도 이 작품집은 지금 구할 수가 없다. 인터넷에서 그때 나왔던 사진 엽서 한 장이 100 유로 선, 포스터는 1000 유로 정도로 거래되고 있다.

1968. 독일 카셀 국제예술제에 설치한 패키지. 일면 소시지. © Archivfoto: Lengemann

1968-69 해안 포장하기Wrapped Coast

“듣도 보도 못한 아트”

그 이듬해 그들은 호주에 간다. 호주 시드니 남동쪽에 있는 리틀 베이의 해안을 흰천으로 감싸기 위해서였다.  기구 패키지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띄울 수 있지만 해안을 천으로 덮어버리면 장소와의 관계가 형성된다. 호주 해안 포장을 시작으로 크리스토와 잔끌로드는 패키지 띄우기 시대를 벗어나 장소 포장의 시대로 넘어간다. 

시드니 중심가로부터 약 14.5 km 떨어진 리틀 베이는 프린스 헨리 병원의 사유지였다. 남태평양을 바라보며 총 2.5km를 달리는데, 폭은 좁은 곳이 46m, 가장 넓은 곳이 244m이며 북쪽 끝에 26m 높이의 낭떠러지가 있다. 해안의 굴곡이 심하고 바위가 울퉁불퉁한 것이 꼭 우리나라의 해안을 연상시킨다. 

이 해안을 포장하기 위해 약 9만 3천 m2의 천을 썼다. 일반 농장에서 쓰는 부식 방지용 두꺼운 합성 섬유를 썼다. 이 천을 묶는데 1.5cm 굵기의 밧줄 56.3km(!)가 들어갔다. 여간한 기운이 아니고는 이걸로 바람부는 해안에서 펄럭이는 천을 묶을 엄두를 못 낼 듯 하다. 선물 포장처럼 완전한 두루두루 포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밧줄을 땅에 고정시켜야 했다. 고정용 클립, 대형 앵커 등  2만 5천 개를  건Ramset gun으로 쏘았다.  

공병대 출신으로 은퇴한 니니언 멜빌Ninian Melville 소령이 현지에서 작업을 총지휘했다.

15명의 전문 등반가, 100명 이상의 알바생(시드니 대학, 이스트 시드니 기술대학 건축학과, 미술학과. 호주 예술가, 교사 등이 자원) 참가하여 4주 동안 17000 시간에 걸쳐 작업했다.  임금을 거절한 건축학과 학생 11명을 제외하고 모두 임금을 받았다.

리틀 베이 해안은 1969년 10월 28일부터 10주 동안 포장된 상태로 있다가 모두 철거하고 다시 바람부는 해안으로 되돌아 갔다.

영향 – 퍼블릭 아트의 탄생

해안은 말이 없었으나 그 여파는 컸다. 그런 “듣도 보도 못한 아트”에 접한 시드니 예술계는 흥분했다. 현지에서 프로젝트의 구현을 도왔던 미술 수집가 존 칼도르John Kaldor는 흥분한 나머지 Public Art Projects라는 조직을 결성한다. 1968년은 그외에도 달팽이 방파제를 선두로 랜드아트가 시작된 해였고 서구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문화 혁명이 일어난 해였다. 이제 시드니 앞바다에서 퍼블릭 아트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예술의 물결이 출렁대기 시작했다. 칼도르의 퍼블릭 아트 프로젝트는 이후 수많은 퍼블릭 아티스트를 초대하여 의미있는 행사를 개최했고 이 움직임은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68년 시드니 리틀 베이wrapped Coast © Photo: Wolfgang Volz, © Christo and Jeanne-Claude

출처:

호주 시드니 리틀 베이 위치


© 3.SPACE 매거진/환경예술/크리스토와 잔끌로드 3

Series Navigation<< [크리스토와 잔끌로드 2] 배럴 신드롬크리스토와 잔끌로드 4 – 턴 커튼 >>

댓글을 남겨 주세요.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Pin It on Pinterest

Shar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