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물결이 출렁이는 십만평의 땅
꽃이 가득한 36 헥타르의 문화재. 테마정원 다양성과 꽃 다양성이 공존하는 곳. 공원. 꽃의 바다. 체험나라. – 에가파크 홍보문구다.
하나도 과장이 아니다. 에가파크는 꽃의 바다가 맞다. 36헥타르, 십만평의 넓은 땅에 꽃의 물결이 출렁이는 곳 맞다. 올해 부가때문에 부지런히 심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그랬다. 오래전부터 회자하던 꽃의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에카파크는 정원박람회 아니라도 꽃이 붐비는 곳이다. 아래 사진은 2016년 봄 에가파크를 찾았을 때 찍은 것. 공원을 종으로 가로지르며 조성되어 있는 화단의 면적만 6천 m2, 유럽에서 제일 큰 화단임을 자랑한다.


에르푸르트에 튀는 불꽃
BUGA 준비가 시작되면 독일부가사와 개최시에서 반반씩 출자하여 유한회사를 설립한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현재 에르푸르트시와 독일부가사 사이에 갈등이 번져 크게 삐그덕거리는 것 같다.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부가사의 입장에서는 부가는 우리 것이라는 생각에 총 지휘권을 가지려 할 것이고 에르푸르트 시는 우리가 정원박람회의 원조라는 자존심으로 맞설 것이다. 에르푸르트 시 정원박람회의 책임자는 도시녹지국 국장이다. 만만치 않은 인물로 소문난 사람이다. 통일 직후에 독일 전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었다. 서독출신은 우리가 더 잘사니 더 잘났다고 생각했고 그런 태도가 동독출신의 감정을 크게 상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부가 개막을 코앞에 두고 에르푸르트에선 불꽃이 여기저기서 튀고 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정원박람회 개최 자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고 일선의 실무자들이 죽을 맛일 것이다.
에가파크의 역사를 살펴보면 왜 불꽃이 튈 수 밖에 없는지 이해가 간다.
에르푸르트의 에가파크 – 본래 치리아크 산성
에가파크의 역사는 18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발 265미터 치리아크 산성이 그해에 녹지로 지정되었다. 그 이전 1871년에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여 하나의 거대한 제국을 이루면서 각 도시 산성의 역할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군대는 축소되고 군사시설도 하나 둘씩 철거되었다. 지금은 성벽과 두 개의 둥근 탑만 남아 있다. 에르푸르트 시에서는 이곳을 녹지로 지정하고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다 세계제1차대전이 터졌고 전쟁이 끝난 뒤 전쟁에 넌덜머리가 난 에르푸르트 시민들은 치리아크 성의 군사적 이용을 완전히 포기했다. 1924년 프로이센 제국의 황제에게 황금 이십만 마르크를 주고 치리아크 성과 그에 속한 토지를 양도받았다. 이때 황제가 제시한 조건이 있었다. 성벽을 그대로 보존하여 문화재로 지키고 토지를 공공용지로만 이용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이 무렵 에르푸르트는 산업도시로 한창 성장했고 인구가 팽창하였기에 치리아크 산성을 시민들의 휴양공원로서 본격 조성하기 시작했다. 토양이 녹지 조성에 적절치 않아서 어려움이 많았고 시간과 비용이 증가했다. 그러다 경제공황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에르푸르트 시는 공사를 중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긴급조치>를 발령하여 실업자를 고용, 작업을 강행했다.
1928년 5월, 드디어 치리아크 산성 공원이 완성되어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그때는 면적이 13.2 헥타르 지금의 3분의1이 조금 넘는 규모였다. 이때 장미원과 칼 푀르스터의 개념을 딴 숙근초 정원이 에르푸르트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1935년에는 둥근포탑을 전망대로 바꾸어 오픈했다.
1942년 에르푸르트 시 1200주년 기념으로 정원박람회를 개최할 예정으로 준비를 시작하다가 이번에는 세계제2차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또 중단해야 했다. 치리아크 공원에 다시 군대가 주둔했고 전망대에 대포가 다시 장착되었으며 성곽 지하 공간은 대피소가 되었다.
정원박람회로 허기 이기기
1945년 9월 2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세계제2차대전이 끝났다. 독일에서는 그보다 4개월 먼저 사실상 종전되었다. 그해 10월, 거의 완전히 파괴된 도시에서 에르푸르트 시민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꽃박람회 개최였다. 덜 파괴된 건물을 하나 잡아서 안팎에 꽃과 채소를 심고 “허기를 이기자!” 라는 눈물나는 모토를 내걸었다. 경제부흥, 도시농업 등이 이슈가 되었다. 그 이듬해에도 도시농업을 테마로 삼아 다시 정원박람회를 열었다. 그러나 박람회를 제대로 열기 위해서 가건물과 그 주변의 빈터는 정답이 아니었다. 새로운 장소가 필요했다. 1948년, 당시 시장이 담당 공무원들과 논의한 끝에 치리아크 산성 공원을 향후 상설정원박람회장으로 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49년 전쟁 피해로 쌓인 돌무더기를 치우며 공원 재조성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치리아크 공원은 칼 푀르스터의 제자들이 바통을 물려가며 디자인하고 만들고 가꾸게 되었다. 규모만 다를 뿐 조성의 역사와 공원 콘셉트는 포츠담의 우정섬과 매우 흡사한데 그 까닭이 바로 같은 인물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에르푸르트의 치리아크 공원(지금의 에가파크)와 포츠담의 우정섬 공원을 만들고 다듬었기 때문이다.((2차대전이 끝난 후 동서가 갈라지면서 포츠담이 동독의 영토에 소속되게 되었다. 그때 칼 푀르스터 주변의 인물 중 세 명이 동독에 남아 후일 동독 조경계를 이끄는 기둥이 된다. 그중 2인은 동베를린 훔볼트 대학 조경학과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서베를린에서도 칼 푀르스터 주변 인물이었던 마테른과 함머바허 2인이 조경계의 기둥이 되었으므로 후일 통일되었을 때 동서의 도시풍경이 삐그덕거림 없이 조화롭게 맞물릴 수 있었다.))
첫 타자는 발터 풍케Walter Funcke(1907~1987)였다. 그는 공원을 완전히 새로 설계하지 않고 전전의 기본 구조를 그대로 보존한 채 우선 기능적인 동선체계를 수립했다. 정원박람회장은 일반 휴양공원과는 또 다른 동선체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네 채의 실내 전시장을 짓고 모델정원 다섯 곳을 조성했으며 전시정원을 여러 곳에 배치하고 러시아 식물학자 미추린을 기리는 기념정원을 만들었다. 파빌리온과 분수 네 개를 더 만들고 둥근탑 두채를 다시 전망대로 꾸미고 나자 이제 정원박람회를 개최할 수 있는 기본 시설이 갖추어졌다. 이때 부지 면적도 35헥타르로 커졌다.
1950년 7월 6일, 마침내 “꽃피는 에르푸르트”라는 모토 하에 수백의 원예, 조경업체가 참가한 가운데 에르푸르트 정원박람회가 열렸다. 오십만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아 들었다. 이후 절기마다 꽃축제가 열렸으며 휴양센터, 식당, 동물원, 놀이터, 야외무대 등이 차례로 들어섰다. 1953년 치리아크 산성공원은 문화공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 기념으로 꽃축제를 열어 또 다시 5십만명의 방문객을 동원했다.
서독의 BUGA와 맞장뜨기 – 사실은 우리가 원조
그사이 에르푸르트 시는 식물종자산업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1955년 정원박람회와 원예종자수출전시회를 접목하여 개최했는데 에르푸르트 식물종자 퀄리티에 대한 소문이 동구권을 넘어 유럽 전체에 자자했으므로 이 역시 대성공이었다. 그러자 이제는 서독의 함부르크 정원박람회나 BUGA와 맞장을 뜨고 싶었다. 아니 그 보다는 우리가 원조라는 점을 확실히 하고 싶었다. 1957년 위원회가 조직되어 작업에 착수했고 이듬해 <에르푸르트 사회주의국제정원박람회>를 발족했다.
1961년 제1회 사회주의 국제정원박람회
이때 총괄 책임을 맡은 인물은 라인홀트 링그너Reinhold Lingner(1902~1968)였다. 발터 풍케에 이은 칼 푀르스터 주변 인물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발터 풍케가 라인홀트 링그너 지휘체계에 속하게 되었다. 링그너가 전체 마스터플랜을 짜고 풍케가 부분 설계를 맡았다. 링그너가 몇 해 선배이기도 했지만 그의 카리스마와 명성이 더 컸기 때문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풍케는 식물디자인의 고수였고 링그너는 큰 틀을 먼저 바라보는 대형 디자이너였다. 이때 박람회장이 57헥타르로 확장되었으며 1958년에 준비를 시작하여 1961년 박람회 개막식에 맞추느라 나중에는 ‘인민’들까지 모조리 동원하여 작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로와 산책로 18.3km를 새로 놓았고, 전시장 13채를 새로 지었으며, 실내식물원, 파빌리온, 연못, 분수 등 수많은 시설이 새로 들어섰다. 무리하게 면적을 확장하여 흙을 쌓고 나무를 심고 축구장 열 배 면적에 잔디를 깔고 등등. 사회주의적 통제하에 일사분란한 작업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1961년 4월 28일 드디어 제1회 사회주의 정원박람회가 문을 열었고 소련,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카이 등에서 참가하여 각국의 원예식물, 채소, 과일 재배 기량을 견줬다. 소련에서 단체로 몰려왔는지 6개월 개최기간 동안 3백 5십만 방문객을 기록했다.
지금의 에가파크는 당시 링그너가 그린 마스터플랜의 기본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에가파크 아카이브 사진(해상도 낮음)
에가파크 2016+2020
다음 회에는 에가파크의 마스터플랜을 자세히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