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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작별

화단에 붉은 색 일년생 꽃들이 가득하다.

리버만 정원의 붉은 꽃 화단. 1926년 작. Public Domain

케테 콜비츠가 배웅한 막스 리버만의 마지막 길

2월 8일, 막스 리버만의 91회 기일을 맞아

 

“막스 리버만이 죽었다. 그를 위해 죽음을 원했지만 막상 죽음이 닥치니 충격이 왔다.”

1935년 2월, 케테 콜비츠는 자신의 일기에 짧지만 무거운 문장을 남겼다. 나치의 압박 속에서 고립된 채 87세로 생을 마감한 독일 인상주의의 거장 막스 리버만 Max Liebermann(1847~1935). 나치는 그의 죽음을 철저히 외면했고, 예술가들에게 그의 장례식 참석을 금지했다. 하지만 케테 콜비츠는 빈소를 찾아 뼈만 남아 앙상한 그의 마지막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장례식 날 다시 검은 옷을 입고 거리로 나섰다. 베를린 유대인 묘지의 장례식장 입구는 게슈타포가 지키고 있었다. 베를린 예술원 원장을 지낸 국가적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추모는 금지되었다. 화려한 국가장은커녕 최소한의 예우도 없었다. 예술원 동료와 고위 관료들은 나치의 눈치를 보느라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2월 초의 베를린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케테 콜비츠는 게슈타포의 차가운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의 귀여운 손자가 나치사상에 오염되어 있었고 그녀 역시 미대 교수직을 박탈당한 참이었다. 예술원에서도 강제 퇴출당하였기에 사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다. 그녀에게 막스 리버만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말이었다. 예우를 보이고 싶었다. 그녀 역시 칠순을 앞두고 있었으나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막스 리버만 자화상. 1916년 작. 브레멘 미술관 소장. Public Domain

빛의 거장, 어둠의 화가를 알아보다

두 사람의 인연은 18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케테 콜비츠는 21세의 신예였고 20세 연상의 막스 리버만은 베를린 예술계의 거장이었다. 케테 콜비츠가 베를린 미술 대전에 ‘직조공의 봉기 연작’을 출품했을 때, 심사위원장이었던 막스 리버만은 그가 평생 추구해 온 ‘빛의 유희’와는 정 반대편에 있는 어둠의 진실을 보았고 감격했다. 리버만은 상류층 유대인으로서 교양과 여유를 상징하는 인물이었지만, 콜비츠의 거칠고 투박한 선 안에 담긴 민중의 비통함이 곧 예술적 숭고임을 즉각 알아차렸다. 무엇보다 케테 콜비츠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에 흥분했다.

그는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이 뛰어난 작품을 제출한 케테 콜비츠에게 훈장을 수여함이 마땅하다고 고했다. 황제는 콜비츠의 작품을 ‘시궁창 예술’이라 비하하며 거부했다. 리버만은 황제와 기존 화단의 권위에 맞서며 케테 콜비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케테 콜비츠를 분리파로 끌어들이고 베를린 예술원 회원이자 미술대학 교수의 길을 열어 주었다. 리버만에게 예술적 자유란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세계의 진실을 포용하는 것이었다.

 

고통의 전이: 부르주아적 관조에서 실존적 연대로

케테 콜비츠가 뮌헨에서 그림 공부를 하던 시절 막스 리버만의 화풍에 반하여 자주 따라 그렸다. 그러나 케테는 곧 자신 만의 예술 세계를 발견한다. 빈민촌 환자를 돌보는 의사 남편과 오빠의 영향도 컸다. 그리고 그 무렵 연극 무대에서 보았던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직조공”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콜비츠 자신은 가난하지 않았지만 타고난 깊은 공감 능력으로 굶주린 아이들과 농민의 고통을 판화에 새겼고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절규를 대신 외쳐 주었다.

한편 막스 리버만은 아름다운 반제 호숫가에 빌라를 짓고 정원의 빛을 그리는 여유자작의 관조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케테 콜비츠의 예술적 기준점이었고 „고결한 노신사”였다.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예술적 정직함이었다. 리버만은 예술이 권력의 장식품이 되는 것을 혐오했다. 콜비츠는 예술이 인간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다.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주는 역동성과 그 이면의 고독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던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척박한 프로이센의 예술 토양 위에서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 ©고정희

 

암흑기 속에 핀 고결한 우정

나치가 권력을 잡은 1933년 이후, 두 사람의 삶은 급격히 침몰했다. 리버만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콜비츠는 반나치 성향의 사회주의 예술가라는 이유로 모든 명예를 박탈당했다. 리버만은 죽기 직전 “내 고향 베를린을 알아보지 못하겠다”며 한숨지었다. 콜비츠는 그가 겪는 수모를 자신의 고통처럼 느꼈다. 리버만의 몰락이 곧 독일 지성의 몰락이라 생각했다.

“그를 위해 죽음을 원했다”는 그녀의 일기 구절은 냉혹함이 아니라, 나치의 야만적 세상에서 리버만이 겪어야 했던 인간적 모멸감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던 데에서 오는 깊은 연민이었다. 고결한 노화가에 걸맞은 고결한 안식을 위한 기도였다.

리버만의 장례식 날, 겨우 백명의 조문객이 모였다. 대부분 유대인이었고 나치가 정의한 ‘순독일인’은 콜비츠와 동료 부부 단 세명이었다. 리버만을 배웅하는 것은 그녀에게 절대 피해서는 안 되는 인간 된 도리였다. 그리고 자신이 믿어왔던 자유로운 예술의 시대를 배웅하는 것임도 직관했다.

2년 뒤, 퇴폐 예술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목으로 케테 콜비츠의 작품이 몰수당했다. 나치들은 몰수한 작품을 거간꾼을 통해 전 세계에 팔아 넘겼다. 곧 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케테는 남편과 손자와 집과 아틀리에를 모두 잃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둘째 아들이 전사한지 28년 만에 손자마저 전쟁에서 잃자 케테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전쟁은 이제 나를 완전히 앗아갔다.”

전쟁이 끝나기 불과 3주 전, 케테는 객지 드레스덴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77세였고, 막스 리버만이 죽은 지 10년 되던 해였다.

오늘 베를린에서

현재 베를린 파리 광장 Pariser Platz에 복원된 리버만의 집과, 구 경비대를 지키고 있는 콜비츠의 조각 “피에타”는 서로 멀지 않은 곳에서 이 도시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빛을 그리던 노화가와 어둠을 새기던 여성 화가. 두 사람 사이의 묵직한 연대가 오늘 2026년 2월의 차가운 베를린 공기 속에 조금은 온기로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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