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에 별을 본 적 있는가? 나는 봤다. 하늘이 아니라 미국풍나무American sweetgum의 우듬지 아래에서. 뉴욕식물원에는 개발의 손길이 한번도 닿지 않은 숲이 남아 있는데, 해마다 그 숲을 수없이 걷는 동안 이 놀라운 나무가 늘 나를 맞아주었다. 사계절의 모습을 다 보아왔지만, 나를 어김없이 멈춰 세우는 것은 빛이 사그라드는 오후 네 시의 풍경이다. 퇴약볕을 피해 숲 속으로 들어가, 햇빛이 아롱진 하늘을 올려다보면 머리 위에는 은하수가 흐르고 있다.

 

뉴욕식물원 세인 패밀리 포레스트 ©️이성희 

 

미국풍나무의 다섯 갈래 잎은 아이가 떠올리는 별 모양을 닮았는데, 어쩌면 천문학자가 설명하는 별보다 진짜 별에 더 가깝다. 햇빛을 머금은 잎은 반투명해지면서 안에서부터 빛나는 섬세한 잎맥의 배열을 드러낸다. 잎 하나하나가 제 안의 불꽃으로 밝혀진 듯 빛을 붙든다. 그것들이 모여 한낮의 하늘에 흩뿌려진 수백 개의 초록 별처럼 반짝인다. 서둘러 지나가는 이들은 알아채지 못할 만큼 은은한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이 나무를 몇 번이고 다시 찾게 된다. 본다는 것은 시력의 문제라기보다는 멈춰 서서 음미할 수 있는 마음의 문제라는 걸 내게 가르쳐주었다.

 

뉴욕식물원 사우스 그로브 ©️이성희 

 

계절이 바뀌면 나무의 표정도 바뀐다. 가을은 금빛, 호박빛, 진홍, 자줏빛, 짙은 보라의 놀라운 색채를 가져오는데, 종종 한 그루에 그 모든 색이 함께 나타난다. 10월의 눈부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잎들은 거의 발광하는 듯 보인다. 마치 여름의 햇빛을 모아두었다가 마지막으로 숨막히는 광경을 펼치며 한꺼번에 놓아주는 것처럼. 온전히 물든 미국풍나무 아래 설 때마다 나는 자연이 단순히 풍경을 채색하는 것이 아님을 떠올린다. 자연은 빛이 우리 각자에게 어떻게 저마다의 색에 관한 해석을 갖게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뉴욕식물원 습지 산책로 ©️이성희 

 

겨울이 되면 가지는 헐벗지만, 나무는 자신의 정체성을 조금도 잃지 않는다. 잔가지 사이에 낯익은 가시투성이 열매 방울들이 기묘한 장식처럼 매달려 있다. 그 이상하고 어딘가 엉뚱한 형태는 한 번이라도 그것을 밟아본 사람에게는 좀처럼 사랑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퇴근 후 정원을 거닐던 늦은 오후에 그것들을 가장 감탄하며 보게 되었다. 저녁 해가 숲 언저리로 낮게 걸리면 열매 하나하나가 땅 위로 길고 섬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평범한 열매가 조각품이 된다. 이 기묘한 열매마저도 빛이 닿으면 달라 보인다.

 

뉴욕식물원 진달래정원 ©️이성희

 

계절이 연출하는 드라마의 관객이 아니라 정원관리팀의 일원으로서, 이 기묘한 열매의 모든 면을 끌어안기란 쉽지 않다. 잘 다듬어진 잔디밭에 흩어진 미국풍나무 열매를 치우는 일은 계절마다 반복되는 관리 작업 이상이다. 열매를 덮은 촘촘한 가시들은 잔디를 단단히 붙잡는다. 강한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는다. 잎이나 잔가지처럼 쉽게 분해되지도 않아서 일반 정원 폐기물과 분리해서 수거해야 한다. 삽이나 쇠스랑으로 쉽게 퍼올릴 수도 없다. 가을내내 이어지는 낙엽과의 긴 전쟁은 1월 경 되어야 미국풍나무 열매와의 전투로 마무리되고, 곧이어 눈과의 전쟁이 이어진다.

 

뉴욕식물원 메인 론 ©️이성희

 

미국풍나무는 내게 아름다운 나무 이상이다. 계절을 함께 건너는 성실한 동반자이자, 말없는 스승이다. 찾아갈 때마다 전에는 알아채지 못한 무언가가 드러난다. 아침과 저녁, 봄과 가을, 햇빛과 구름이 각각 이 나무의 또 다른 면을 드러낸다. 이 나무는 장소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눈 속에서, 골짜기 위에서, 숲의 수관 아래에서.

 

뉴욕식물원 진달래정원 ©️이성희 

 

기억에 남는 나무는 저마다 다시 찾아오는 이에게 가르침을 준다. 미국풍나무의 가르침은 빛이 결코 세상에 그저 내려앉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빛은 살아 있는 것들이 받아들이고, 변형하고, 조용히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무엇이다. 그것을 보는 법을 배운 뒤로 나는 미국풍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한낮에 빛나는 별을 다시 만나기를 바라며 올려다보거나,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려 기다리는 열매를 내려다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grulandscape.com)에 실린 글을 변역했습니다. 원문은 이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필자소개 — 이성희

미국 롱아일랜드의 유서깊은 영국 저택 소속 플랜팅필즈수목원Planting Fields Arboretum에서 인턴으로 근무했고, 뉴욕 브롱스 소재 뉴욕식물원의 정원운영센터Horticultural Operations Center와 놀런그린하우스Nolen Greenhouses에서 생산/전시 담당 가드너로 일했다. 이후 국제 공인 아보리스트로서 1880년 설립된 수목관리전문회사 Davey Tree Expert Company에서 근무하다가 최근 GRU Landscape & Design을 설립하여 독립 가드너로 일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했고,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까지 SK브로드밴드, CJ그룹, 케이아이엔엑스, 티맥스소프트 등에서 경영기획업무를 담당했다. 2018년 뉴욕주립대SUNY Cobleskill에 편입학하여 Plant Science와 Landscape Development를 전공했다. 북미 자생식물을 중심으로 자연주의 정원을 추구하며, 뉴욕주 중북부Upstate New York의 혹한기를 견딜 수 있는 다양한 정원 식물 발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메일 : grulandscape@gmail.com
페이스북 : facebook.com/onlygrace.lee


© 3.SPACE MAGAZINE / 3. GARDEN / G-1. 식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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