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학의 아버지 세 명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레온하르트 푹스Leonhart Fuchs (1501-1566)는 매우 불편한 인간이었던 듯합니다. 고지식한 학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옳고 그름을 지나치게 따지는 나머지 인간적인 면을 소홀히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타고난 성정도 관계가 있겠죠.

41세의 레온하르트 푹스. Heinrich Füllmaurer가 그렸다. 하인리히 퓔마우어러는 푹스의 식물사 책의 삽도를 제작한 화가 중 한 명이었다. 출처: 1986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렸던 독일 남서부의 르네상스 전시회 카탈로그 중. Wikimedia Commons
푹스는 1542년 ⌈식물의 역사De Historia Stirpium⌋라는 책을 출간하여 식물학에 매우 중요한 유산을 남깁니다. 어려서부터 신동이어서 14세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립학교를 차렸다가 일년 만에 접고 공부를 다시 시작한 기이한 행적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만 23세에 의학박사가 되었습니다. 그후 칠년간 안스바흐 후작의 주치의를 지냈는데 이 시절에, 정확히 말하자면 1529년에 영국에서 건너와 독일을 휩쓸었던 열병을 치료하는데 성공합니다.((Anna Pavord, Wie die Pflanzen zu ihren Namen kamen, Berlin Verlag 2008, p. 214 )) 이로 인해 명성이 더욱 높아져 튀빙겐 대학의 의대교수로 부름을 받은 것 같습니다. 아내와 열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튀빙겐으로 이주한 푹스는 튀빙겐 의대에서 식물학과 의학의 발전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으며 여기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자택 정원에 약용식물원을 조성했었는데 튀빙겐 시에서는 이것이 유럽 최초의 혹은 두 번째의 식물원이라고 주장합니다.((http://www.tuepedia.de/index.php/Nonnenhaus)/)) 하지만 조성 연대가 불확실하고 오래 전에 자취가 사라져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2008년도에 튀빙겐 시에서 이를 복원하고 푹스 기념정원이라 명명한 바 있습니다.
푹스의 대표 저서, <식물의 역사>는 당시 매우 혁신적이었습니다. 500 점의 세밀화를 그려 넣은 것과, 각 식물에 대한 설명기법에 체계를 둔 것(식물명, 형태, 분포지, 생장조건, 특성)이 새로웠습니다. 각 식물에 대해 저명한 학자들의 설명을 종합 요약한 뒤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주석을 곁들였고요. 지금의 식물도감 서술법이 여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했던 것은 “자연에서 식물을 관찰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16세기 식물학을 근본적으로 혁신한 점입니다. 사실 푹스가 자연관찰의 선구자는 아니었습니다.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할 때 이미 그의 스승이 도입한 교수법이었습니다. 푹스의 공적은 이 방법을 세상에 널리 퍼뜨렸다는 점이겠지요. 매우 시끄럽게 외쳤나 봅니다:
학자들이 상아탑에 앉아 자연관찰을 게을리 하니 어디 학문이라 하겠는가. 약초를 채취하러 다니는 무식한 촌부들과 약초를 파는 아낙들에게 이일을 맡길 것인가. “((Fuchs 1542, Pavord 2008, p. 216에서 인용함.))
푹스가 평생을 살았던 튀빙겐의 집. 본래 도미니쿠스 수도원의 수녀들 집이었으나 종교혁명으로 수도원이 해체되었기에 푹스 가족에게 돌아갔다. 사진: HubertQ, 출처: Stadtwiki Tuebingen
그의 시끄러운 외침은 튀빙겐의 영주 울리히 공작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공작은 교수들에게 자연답사를 의무과목으로 정하라고 영을 내렸습니다. 이때부터 모두 자연에 나가 식물을 직접 봐 가면서 공부해야 했습니다. 중세에는 오히려 약사들과 “약초아낙”들의 식물지식이 풍부했습니다. 학자들은 이를 ‘천한 일’로 여겼으므로 학문에 발전이 없었던 것이고요. 꼭 지금의 어느 나라 얘기를 듣는 것 같습니다. 암튼 의학이 본래 철학에 기초를 두었기 때문에 고고한 의사들이 실무에서 멀어져 갔던 겁니다. 당시 의사들이 식물학자를 겸했으니까요. 그들은 약초의 특성과 효과들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방혈에만 의지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논쟁을 절대 피하지 않았던 불편한 인간, 시끄러운 레온하르트 푹스의 덕으로 자연 답사와 직접 관찰에 근거한 약용식물학, 의학이 빠른 속도로 발전해 갔습니다. 그리하여 16세기는 관찰에 근거한 식물학이 지배하는 멋진 세기가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 조선시대 실학운동을 연상케 합니다. 실학이 억압되지 않았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요?
본문에서 레온하르트 푹스 찾기
- 174쪽: 생육하고 있는’ 식물에 관심이 많았던 현장 식물학자 레온하르트 푹스
- 199쪽: 그림 4.19 푹스 식물사 책의 삽화
- 222쪽: 인명 설명
- 361쪽: 그림 8.8 푹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식물 푸크시아
© 고정희의 홉하우스 읽기
흥미진진한 이야기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댓글이 거의 없는 편이라 넘 반갑네요. 앞으로도 종종 글 남겨주세요~
관심있는 분야라서 유익하고ᆢ재밌어요^^
식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자연신성*의
창조성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유익하고 재미있다니 다행입니다. 신비로운 식물의 세상에 오신 것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