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사나 식물애호가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작은 씨앗에서 싹이 트고 그것이 자라서 꽃이 되고 나무가 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식물이 기적의 존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 경우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지만 과학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날마다 식물이 펼쳐내는 기적쇼를 보고 있으면서도—가시가 달린 녹색 줄기에서 어느 날 문득 나타나는 붉은 장미꽃, 풀줄기에 매달리는 알곡, 텃밭에서 날마다 신선한 잎을 펼쳐 보이는 상추—이 모든 과정이 기적이 아니랄 수 없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측정 가능한’ 증거만을 찾는 과학자들이 안쓰러울 때가 많다.
수년 전부터 과학자들 사이에서 “혹시 식물에 혼, 내지는 뭔가 그와 비슷한 어떤 것이 있는 것 아닐까?”라는 질문이 화두가 되고 있다. 지금 신경과학, 생태학, 생물학, 식물학 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각축전을 시작했다. 예를 들어 식물신경생물학자 Plant Neurobiology 스테파노 만쿠소Stefano Mancuso는 식물의 지능과 생각하는 능력을 주장한다. 그 반대편에 서 있는 학자들은 뇌가 없는데 어떻게 지능이 있고 생각이 있겠느냐고 반박한다. 이제 학자들도 식물에게 뇌는 없지만 인간의 신경계와 유사한 신호 전달 체계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이들이 내는 신호의 채록도 가능하다. 인간 중심의 시각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식물이 없으면 우리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진리를 잊고 사는 사람들은 식물의 존재 가치를 수용하기 위해 이제 식물더러 소리를 좀 내 보라고 요구한다. 소리를 내야 비로소 존재함을 인정하겠다는 뜻일까? 이렇게 투덜대면서도 식물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재즈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미
지난 5월 21일, 독일에서는 최초로 식물 콘서트가 열렸다. 쾰른의 대안학교에서 니콜라우스 샤르트라는 재즈 피아니스트가 장미와 야자수가 보내는 전기 시그널을 피아노 건반과 연결해 음악으로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 방식이 독특하여 조금 설명해 보려 한다.
니콜라우스 샤르트는 우선 장미와 야자수 잎 그리고 뿌리 사이에 측정 장치를 연결했다. 이 장치는 식물 내부의 수액 흐름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하는 전기 저항 값을 측정한다. 수액의 흐름이 커지면 전기 저항이 낮아지고, 전기 저항이 낮아지면 낮은 음이 생성된다. 반대로 흐름이 약해지면 저항이 커지며 높은 음이 발생한다. 이 전기 신호를 자동 연주 기능이 있는 피아노 건반과 연결한 모양이다. 이때 우리에게 익숙한 멜로디나 비트와는 전혀 다른 몽환적인 음이 불규칙하게 툭툭 튀어나온다고 한다. 니콜라우스 샤르트는 식물이 던지는 음을 바탕으로 깔고 그 위에 재즈 명곡 <Mercy, Mercy, Mercy>나 <쾰른 콘서트 1부> 등의 변주곡을 연주했다. 말하자면 식물이 보내는 무작위 음향을 독특한 베이스 라인이나 대위법적 선율로 삼아 그 위에 기존의 재즈 곡을 화음으로 ‘얹은’ 것이다. 인간과 식물의 실시간 재즈 잼 세션이었다. 아쉽게도 이 콘서트는 학교 교육 행사 중에 열렸기 때문에 일회성에 그쳐 연주 장면 사진도 음악도 보고 들을 수 없다. 후일 유튜브 채널 등에서 보고 들을 수 있게 현재 준비 중일지도 모른다. 곧 알게 될 것이다.
헬렌 안아히타 윌슨의 식물 음악, <linea naturalis>
영국의 작곡가 헬렌 안아히타 윌슨Helen Anahita Wilson은 그보다 먼저 식물의 생체 전기 신호를 본격적으로 음악으로 만들어 2023년부터 대중에게 선보이기 시작했다.
헬렌이 식물 음악 작업에 몰두하게 된 것은 개인적인 투병 경험이 계기가 되었다. 헬렌은 암 진단을 받고 화학요법(항암치료)을 포함한 치료 과정을 거쳤는데, 이때 많은 항암제가 실제 ‘식물’에서 추출된다는 사실을 알고 영감을 받았다.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2023년, 그녀는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원인 ‘첼시피직가든Chelsea Physic Garden‘의 상주 작곡가로 활동하며 식물의 전기 신호를 수집하는 본격적인 연구와 작업을 시작했다.
첼시 피직 가든은 5,000종이 넘는 약용 및 치유 식물을 보유한 식물원이다. 암 투병을 겪으면서 헬렌은 병원의 멸균되고 삭막한 환경에서 힘든 항암 치료를 받는 환자들에게 ‘당신이 투여받는 약물들이 사실은 이 대자연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소리로써 알려주고 위로하고 싶었다.
이 뜻에 깊이 공감한 식물원 측은 그녀에게 상주 작곡가 자리를 제안하며 식물원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정원의 식물학자들과 협력하여 식물원 내 ‘종양학Oncology 섹션’에서 자라는 항암 성분의 약용 식물들 28종을 엄선했고, 그들의 생체 전기 신호를 정밀하게 채록했다. 식물원 전체가 그녀의 거대한 스튜디오이자 실험실이었다.
헬렌은 식물의 부위마다 음높이가 다르게 나타나고 리듬의 패턴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맞게 악기를 배치했다. 꽃잎에서 얻은 신호는 다양한 음향과 리듬을 보이며 활동적인 반면, 가지와 줄기에서 얻은 신호는 느리게 움직이며 웅웅거리는 소리 질감을 만들어낸다. 이 신호를 컴퓨터에 넣고 음악 데이터로 전환하면서 각 식물 부위의 특성에 따라 악기를 배치했다. 예를 들어 마다가스카르 일일초의 분홍색 꽃잎은 하프로 연주했고 영국 주목의 나무껍질이 내는 음향은 비올라가 연주한다. 이 음향은 트리거로 작동하도록 만들어져 신호가 일정 지점에 도달하면 새소리가 나거나 폭우 소리가 나도록 프로그램을 짰다. 즉 음악 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나 폭우 소리는 작곡가가 임의의 타이밍에 집어넣은 것이 아니라 해당 식물들이 뿜는 생체 전기 신호의 리듬과 타이밍이 스위치 역할을 하여 새소리, 빗소리를 재생하게 했다. 말하자면 식물이 자연의 소리를 직접 지휘하는 것처럼 효과를 낸 것이다.
이 공동의 노력 끝에 탄생한 결과물이 바로 2023년에 발표한 <linea naturalis> 앨범이다. 이 음원의 모든 수익은 영국의 암 환자 지원 자선 단체인 ‘매기스Maggie’s‘에 기부되는 선순환으로 이어졌는데 지금은 유튜브에 앨범 전체가 공개되어 누구나 들을 수 있다.
28종으로 실험을 했으나 앨범에 수록된 식물은 모두 12품종이다. 그중 커버꽃은 마다가스카르 일일초라고 불리는 ‘Catharanthus roseus‘이다. 소박한 꽃이지만 약 70여 종의 알칼로이드를 함유하고 있으며 림프종, 백혈병, 유방암 및 폐암 치료제를 제공한다. 원산지는 그 이름대로 마다가스카르이지만 지금은 열대, 아열대에 두루 서식하며 온대에서도 온실 재배가 가능하다.
헬렌은 첼시 피직 가든의 열대 온실에서 이 일일초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이 꽃이 보내는 신호를 가장 먼저 음악으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일일초 싱글 앨범을 먼저 낸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linea naturalis> 앨범을 만들 때 커버 모델로 썼다.
음악이 실제로 항암 치료 효과가 있는지에 관한 분석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병은 약으로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보면 음악을 듣거나 혹은 항암제 식물을 심어 놓은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지 않을까라는 것이 나의 소박한 믿음이다.
마다가스카르 일일초 싱글 수록곡
<linea naturalis> 앨범 수록 12품종 식물
| 국명 | 영명 | 학명 |
|---|---|---|
| 일본 개비자나무 | Japanese Plum Yew | Cephalotaxus harringtonia ‘fastigiata’ |
| 희수나무 | Chinese Happy Tree | Camptotheca acuminata |
| 영국 주목 | English Yew | Taxus baccata |
| 태평양 주목 | Pacific Yew | Taxus brevifolia |
| 마다가스카르 일일초 (흰색) | Madagascan Periwinkle | Catharanthus roseus – white form |
| 마다가스카르 일일초 (분홍색) | Madagascan Periwinkle | Catharanthus roseus – pink form |
| 양귀비 | Opium Poppy | Papaver somniferum |
| 사이잘 (사이잘삼) | Sisal | Agave sisalana |
| 개똥쑥 | Sweet Wormwood | Artemisia annua |
| 메이애플 | Mayapple | Podophyllum peltatum |
| 머틀 | Myrtle | Myrtus communis |
| 애기빙카 | Periwinkle | Vinca minor |
피처이미지: Catharanthus roseus © Andrew Butko, CC BY-SA 3.0
© 3.SPACE MAGAZINE / 오피니언 / 고정희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