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정원이 온전히 자리를 잡기까지 도면 뒤에는 수많은 설계 조율과 공정의 시간이 필요하다. 독일의 정원 디자이너 마크 크리거Marc Krieger가 설계한 선형을 한국의 대지 위에 현실로 구현해 낸 사람은 오세훈, 이양희, 김명윤이다. 익숙한 식물 자재로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백 년을 버틸 토양기반을 구축한 에비에이터 정원 조성에서 분투한 이들이 내밀한 기록을 전한다.
📝식물 너머의 풍경: 식물 리스트가 정원이 되기까지 | 오세훈

식재 공정 전 대지 위에 규격별로 가배치된 숙근초 및 그라스 포트 ©️오세훈
외국 디자이너의 식재를 국내에 구현하는 과정에서는 늘 식물 수급과 국내 적응성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숙근초 생산과 유통 현장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내 경우에는 디자인과 구현 사이의 간극을 비교적 좁히기 쉬운 편이다.
이번에 마크 크리거의 식재 리스트를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떻게 이렇게 국내에서 비교적 구하기 쉽고 적응성까지 뛰어난 식물들을 골라냈지?”라는 감탄이었다. 한편으로는 다소 익숙하고 ‘뻔한’ 식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정원이 2년 차에 접어들며 생각은 달라졌다. 식물들이 만들어내는 볼륨감과 섞임, 질감과 구조가 계절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모습을 보며, 결국 고수는 익숙한 식물로도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할머니가 밭에서 손수 캐어 주신 자생 부추 ©️오세훈
실제로 식물 수급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더 어려웠던 것은 독활, 눈개승마, 부추 같은 국내 자생 식물들을 박람회 일정에 맞춰 충분히 자란 상태로 구하는 일이었다. 특히 부족했던 부추는 고향 할머니댁 밭에서 일부를 분주해 가져왔는데, 다정하고 인간적인 마크는 식재 도면 속 부추 학명 뒤에 ‘Sehun’s Grandma’라는 이름을 덧붙여주었다.
정원은 단순히 식물을 배치하는 공간이 아니다. 사람의 기억과 애정, 관계가 켜켜이 쌓여가는 적층의 자연에 가깝다. 그렇게 누군가의 손길과 사연이 담긴 식물들이 앞으로 또 어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하게 될지 조용히 상상하게 된다.
📝 풀만으로 정원을 만든다는 것의 무게 | 이양희

배수관거 작업 ©️이양희
사실 시작부터 겁이 났다. 한국의 정원박람회에서 ‘풀만 심는 정원’이 갖는 무게를 알기 때문이었다. 풀은 자칫 쑥대밭이 되거나 몰살되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숙근초를 일시적 장식품으로, 여차하면 교체되어도 별문제 없는 존재로 대하곤 했다. 그러나 두려움과 기대는 거의 같은 무게로 다가왔다. 마크 교수의 숙근초 정원이 그 익숙한 흐름에 도전하는 첫 정원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하지만 단단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지는 느티나무와 이팝나무 그늘 아래에 있었다. 공사는 유려한 선형을 땅 위에 옮기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점질토를 걷어내고 배수관을 깔았다. 40mm 골재와 모래를 섞어 30cm 깊이의 배수층을 만들고, 그 위로 20cm의 정원토를 부었다. 백 년을 약속할 화단의 토양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주변에서는 수군거렸다. 왜 계속 땅만 파고 있느냐고. 그사이 다른 곳에서는 속전속결로 거대한 구조물이 세워지고 선명한 색채가 공간을 채워나갔다.

배수층 작업후 30cm깊이의 정원토 ©️이양희
하지만 투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사다짐을 위한 기층 작업이 이어졌다. 비가 많이 오면 마사가 쓸려나갈 거라는 우리의 우려에, 코디네이터 역할을 맡았던 써드스페이스의 고정희 박사는 독일 전통 방식의 물다짐이라면 문제없다고 확언했다. 사실 우리나라의 궁궐의 마사다짐도 그렇지 않으냐고. 그말은 현실이 되었다. 큰비가 몇 차례 지나갔지만 마사는 제자리를 지켰고, 250mm 깊이로 박힌 목재 엣지도 우아하게 식물의 자리를 지켜냈다. 편견을 내려놓고 기초를 단단히 한 공정이 건네는 보상은 생각보다 컸다. 그 안쪽으로, 내년에도 10년 후에도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숙근초들이 자리를 잡았다.
📝 에비에이터 정원 시공 ㅣ김명윤
첨단 장비보다 확실한 아날로그, ‘물호스’ 마킹

고탄성 물호스로 배치한 가이드라인 ©️ 오세훈
도면 위에 그려둔 유려한 곡선을 넓은 땅에 그대로 옮겨 그릴 때, 현장에서 가장 확실하고 유용한 도구는 무엇일까요? 첨단 GPS 장비도 좋지만, 최고의 무기는 바로 흔히 쓰는 ‘물호스’입니다.
물호스는 특유의 유연하고 탱글탱글한 탄성이 있어 땅 위에 툭 던져놓고 쓱쓱 매만지기만 해도 아주 자연스러운 곡선이 만들어집니다. 호스를 깔아둔 뒤에는 앞으로 길이 될 자리를 직접 이리저리 걸어봅니다.
‘이 정도 폭이면 걷기 편한지’, ‘도면에서 의도한 느낌이 실제 공간에서도 잘 사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자유롭게 선을 수정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시작 단계에서 공간감을 조정한 덕분에 도면의 구상이 잘 구현될 수 있었습니다. 정원 만들기는 첫 밑그림이 가장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쏟은 정성, 터파기담

하부 인프라 구축을 위한 지하층 터파기 공정 ©️ 김명윤
이번 정원 공사에서 가장 많은 비용과 땀을 쏟은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입니다. 식물이 심어질 자리의 기존 흙을 싹 걷어내고, 물이 잘 빠지도록 튼튼한 골재층을 새로 깐 뒤, 식물이 자라기 좋은 흙을 배합해 다시 채워 넣는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는 부분도 아닌데, 숙근초 화단 하나에 땅속 기초 공사로 이렇게 큰 비용을 들였다고 하니 주변에서는 다들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던 그 노력이 지금 가장 확실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폭우가 쏟아져도 끄떡없이 물이 쑥쑥 빠지는 든든한 배수 기반 덕분에, 식물들이 아주 건강하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돌이켜보면 보이지 않는 땅속 기초에 제대로 투자한 것이, 장기적으로는 가장 저렴하고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 특집 | 에비에이터 정원, 다섯 편의 기록
피처이미지: 조성 2년 차에 접어든 에비에이터 정원의 식생 현황 ©️ 오세훈
© 3.SPACE MAGAZINE / 특집 / 에비에이터 정원 조성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