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명작과 미완성의 명작
히드코트와 그레이트 딕스터의 평행우주에 관하여
히드코트 매너 가든과 그레이트 딕스터는 종종 함께 언급된다. 둘 다 20세기 초, 미술공예운동의 정신 속에서 태어났고, 오늘날 영국 정원을 대표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 둘은 닮은 듯 보이지만 전혀 다른 우주를 향해 열려 있다.
히드코트는 로렌스 존스턴 한 사람의 비전으로 시작되고 완결된 정원이다. 설계자도, 정원사도, 최종 결정권자도 모두 그였다. 반면 그레이트 딕스터는 출발부터 달랐다. 주인 부부와 절친했던 건축가 에드윈 루티언스가 단단한 틀을 만들고 여주인 데이지가 식물로 채웠으며 남편 나다니엘이 수 십개의 토피어리를 만들어 세우고 좋아했다. 그에게 정원은 게임이었다. 이 기묘한 정원에서 태어나 자란 그들의 아들 크리스토퍼 로이드는 정원이 평균율처럼 끊임없이 변주되고 반복되는 음악이라고 여겼다.

크리스토퍼 로이드(오른쪽) 와 그의 수석 정원사 퍼거스 가릿 © Great Dixter Charitable Trust
히드코트는 ‘완성’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정원이다. 가든 룸과 시각축으로 구성된 치밀한 공간 미학, 식물의 높이와 색채, 시선의 흐름까지 모두 정제된 상태로 하나의 이상적인 순간에 도달해 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히드코트를 방문할 때, 그곳은 늘 ‘히드코트답다’. 변함없음이 이 정원의 미덕이고 혼이다.
그레이트 딕스터는 그와 반대로 진행형이다. 늘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조금 어수선하고, 때로는 번잡해 보이며, 예상 밖의 장면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바로 그 불안정함이 이 정원의 매력이다.
왜 그레이트 딕스터는 내셔널 트러스트를 택하지 않았을까?
두 정원의 차이는 ‘운영 방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히드코트는 내셔널 트러스트에 의해 관리되며, 특정 시기의 모습을 기준으로 정밀하게 보존된다. 이는 문화유산으로서 매우 이상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그레이트 딕스터는 이 길을 택하지 않았다. 내셔널 트러스트의 관리 시스템은 안정적이지만, 동시에 정원사의 즉흥성, 실패, 과감한 실험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레이트 딕스터가 2003년 독립 자선신탁을 설립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정원은 변하기 위해 존재한다. 정원사와 식물, 그리고 환경 사이의 창조적 긴장감이 사라지는 순간, 이곳의 정체성도 함께 사라질지 모른다.
야생을 들여온다는 것
그레이트 딕스터는 이른 시기부터 야생화 초지와 자연스러운 천이를 정원 안으로 끌어들였다. 잔디를 깎지 않는다는 단순한 결정 하나가, 수십 년에 걸쳐 놀라운 생태적 결과로 이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집중적으로 관리되는 이 정원의 일부 구역, 선큰가든이나 헛간정원이 주변의 자연림보다 더 높은 생물다양성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는 ‘자연스러움’이 곧 ‘방치’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세심한 관찰과 반복적인 개입, 그리고 긴 시간에 걸친 조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다.
결국 그레이트 딕스터 정원은 자연을 흉내 내는 무대가 아니라, 자연과 협상하는 공간이다. 잘 해 줄게 우리 곁에 머물렴, 이렇게 얘기하는 곳이다.

그레이트 딕스터의 토피어리 정원. ©고정희
정원은 누구의 손에 맡겨져야 하는가?
이 질문엔 정답이 없다. 히드코트가 한 개인의 완결된 비전이 시간 속에 보존된 정원이라면 그레이트 딕스터는 여러 세대의 정원사가 각자의 판단과 책임을 안고 이어 온 정원이다. 전자는 안정적이고, 후자는 위험을 감수한다. 전자는 기억을 지키고, 후자는 미래를 시험한다.
이 두 정원의 대비는 ‘정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정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희망적이다. 그래서 정원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그레이트 딕스터 정원 © 고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