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싱허스트 사우스 코타지 © National Trust

시싱허스트 캐슬 가든의 진정한 묘미를 만끽하려면 해가 지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부터 정원이 문을 닫는 ‘황혼dusk‘의 시간까지 머물러야 한다. 관리인이 관람객을 내보내기 직전까지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이곳에 비타 색빌웨스트가 설계한 가장 극적인 빛의 드라마와 그녀의 내면이 투영된 신화적 세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시싱허스트 성의 코티지 가든 © Anne Wareham

첫 번째 이유 사우스 코티지 정원South Cottage Garden이 선사하는 강렬한 시각적 경험이다. 이곳은 비타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의자에 앉아 일몰을 바라보며 안식을 취하던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다. 그녀는 이곳에 저녁노을의 빛을 닮은 식물들을 의도적으로 배치했다. 오렌지빛의 헤디키움Hedychium aurantiacum, 타오르는 붉은색의 가자니아Gazania rigens, 그리고 선홍색과 노란색이 조화를 이루는 가일라르디아Gaillardia는 떨어지는 해의 잔광을 받아 정원을 거대한 불꽃처럼 물들인다. 일몰의 빛은 이 따뜻한 색조의 식물들을 가장 화려하게 깨우는 완벽한 조명이 된다.

두 번째 이유 이 열기 가득한 풍경을 뒤로하고, 사우스 코티지 가든에서 주목 수벽 사이로 난 좁은 통로를 가로지르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그 유명한 화이트 가든이다. 붉은 불꽃의 정원에서 좁은 통로를 통과해 백색의 정원으로 진입하는 과정은 시각적 충격을 넘어선 공간적 전이를 선사한다.

시싱허스트 캐슬 화이트 가든 프리스트 하우스 © 고정희

화이트 가든은 흰색 꽃과 은색, 회색, 녹색의 잎으로만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 낮 동안 화려한 원색에 밀려 주목받지 못했던 아르테미시아와 시네라리아는 어스름이 깔리는 순간 ‘회색 잎들의 낮은 바다’를 이루며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특히 달빛과 황혼 아래서 순백의 장미Iceberg, 백색 아이리스, 황제백합과 디기탈리스의 흰 꽃과 거대한 촛불같은 뿌연 에레무루스 들은 스스로 빛을 내는 듯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이트 가든의 상징인 로사 물리거니Rosa molliganii는 아치형 구조물을 뒤덮으며 폭포수 같은 흰 장미의 장관을 연출하고, 구름을 연상시키는 크람베Crambe와 안개꽃, 아미 마주스나 흰색 꿩의 다리꽃의 섬세한 질감은 마치 정원 전체에 바랜 모슬린 천’을 덮어놓은 듯한 신비로움을 완성한다. 

달빛을 받으며 월광 소나타를 듣고 싶은 곳이다. 

 


© 3.SPACE MAGAZINE / 강의 후기 / 시싱허스트 캐슬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