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번 존스의 연작 “가시나무숲” 중 잠자는 공주. Public Domain

1930년 비타 색빌웨스트가 처음 시싱허스트 캐슬의 폐허를 마주했을 때, 그녀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에드워드 번존스의 그림 ‘가시나무 숲The Briar Wood’이었다. 거친 덤불과 무너진 성벽 사이로 잠들어 있는 고성古城의 풍경은 그녀에게 동화적 상상력을 실현할 무대로 다가왔다. 그때 비타의 심장이 얼마나 격렬하게 뛰었을지 짐작이 간다. 이미 그때 이 황폐한 폐허를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우는 동화 속 장미의 성으로 변신시키리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시싱허스트 매입 계약서에 서명하기도 전에 가장 먼저 사우스 코티지 남쪽 벽에 ‘마담 알프레드 카리에르Madame Alfred Carrière‘라는 연핑크의 덩굴 장미를 먼저 심었다.

시싱허스트 캐슬의 화이트가든 입구 © 고정희

그녀의 장미 사랑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선 수집광적인 면모를 보였다. 비타는 향기가 짙고 형태가 풍성한 고전 장미Old Garden Roses에 매료되어 무려 194종에 달하는 품종을 수집했다. 오늘날 시싱허스트의 모든 벽이 성한 곳 하나 없이 덩굴장미로 뒤덮여 있는 것은 바로 그 집념의 결과다. 정원 전체가 거대한 장미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장미는 이곳의 주인공이자 성의 주인이다.

이 동화적 변신은 정원 곳곳에서 구체화된다. 가장 넓은 면적을 장미원에 할애하여 그녀가 사랑했던 강렬한 붉은색, 진한 핑크색 장미를 가득심은 것 외에도 백색 정원의 중앙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로사 물리거니Rosa mulligarnii‘의 백색 덩굴장미와 순백의 ‘로사 아이스버그Rosa Iceberg‘ 등은 성벽의 거친 질감과 대비되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타에게 장미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잃어버린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폐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마법의 도구였다. 

시싱허스트를 걷는다는 것은 결국 비타가 심어 놓은 장미 덤불을 헤치며, 수백 년의 잠에서 깨어난 동화 속 세계를 탐험하는 것과 같다.

 

OLD GARDEN ROSES 시싱허스트 가든의 고전 장미 컬렉션

© Schmidt Gartenpflanze

 

내셔널 트러스트는 비타가 남긴 식재 기록과 당시의 품종을 고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어서 대부분의 품종을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관리가 너무 어렵거나 질병에 취약한 품종은 교체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우스 코티지 벽을 타고 오르는 장미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1. 상징적인 고전 장미
  • 수집 철학: 비타 색빌웨스트는 현대 장미보다 향기가 짙고 형태가 풍성하며 어딘가 관대해 보이는 고전적인 품종을 선호했다. 1953년 기준 약 194종의 장미를 수집했다.
  • 마담 알프레드 카리에르Madame Alfred Carrière: 시싱허스트 매입 계약서에 서명하기도 전에 가장 먼저 사우스 코티지 남쪽 벽에 심은 역사적인 장미
  • 시싱허스트 캐슬Sissinghurst Castle: 정원 부지 내에서 자생하던 것을 비타가 발견하여 보존한 짙은 붉은색의 갈리카 장미
  • 수브니르 뒤 독퇴르 자맹Souvenir du Docteur Jamain: 짙은 붉은색 꽃이 피며, 비타가 낡은 묘목장에서 발견하여 정원계에 다시 유행시킨 품종
  1. 장미 정원The Rose Garden의 주요 품종
  • 색채와 구성: 핑크, 자주색, 짙은 진홍색 계열이 주를 이루며 화려하고 풍성한 개화감
  • 로사 문디Rosa mundi: 핑크와 흰색의 줄무늬가 특징인 갈리카 장미
  • 투스카니Tuscany: 벨벳 같은 질감의 짙은 암적색 꽃이 피는 품종
  • 마담 이삭 페레이르Mme Isaac Pereire: 강하고 매혹적인 향기를 지닌 부르봉 장미
  • 카디널 드 리슐리외Cardinal de Richelieu: 독특한 보랏빛을 띠는 고전 품종
  1. 과수원The Orchard의 덩굴장미
  • 식재 방식: 늙은 사과나무 등을 지지대 삼아 자연스럽게 나무를 타고 올라가도록 연출
  • 마담 플랑티에Madame Plantier: 나무를 타고 자라며, 비타가 “달빛 아래서 유령처럼 빛난다”고 극찬한 흰 장미
  • 로사 필리페스 키프츠게이트Rosa filipes ‘Kiftsgate’: 나무를 타고 거대하게 자라나는 강인한 생명력의 덩굴장미

© 3.SPACE MAGAZINE/강의 후기/시싱허스트 캐슬 정원/장미의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