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밀화를 들여다보다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좌)과 마리안 노스(우)

올해 초부터 ‘우먼스케이프’라는 제목으로 환경과 조경지에 여성들의 풍경과 정원을 조명하는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다. 여군주들의 풍경으로 시작해 지금은 여성 화가들의 풍경을 다루고 있는데,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과 마리안 노스라는 두 여성 화가에 관한 에세이를 준비하다가 문득 웃음이 났다.

1700년경, 독일 여인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은 수리남의 열대림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150년 뒤 영국 여인 마리안 노스는 세계를 떠돌며 열대 식물을 그렸다. 두 사람 모두 모기에 뜯기고 뱀의 위협을 무릅써가며 그림을 그렸다. 그 때문에 병을 얻어 그리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아마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세밀화는 사진을 찍은 것처럼 정밀했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화폭에 옮겼다. 그 그림들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조선의 선비가 열대림에 갔다면 어땠을까?

 

▮ 글이 더 정확합니다

영화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롯데엔터테인먼트

김훈 작가의 소설 『흑산』을 읽은 지 벌써 15년이 되어가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구절이 하나 있다.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지에서 물고기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관찰한 내용을 동생 정약용과 서신으로 주고받았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때 형이 물었다. “물고기를 그림으로 그려보면 어떨까?”
동생의 답이 걸작이다. “아닙니다, 형님. 글이 더 정확합니다.”
처음 그 글을 읽었을 때 참 아연했다. 글로 물고기를 묘사하는 것이 그림으로 그리는 것보다 더 정확하다니.

정약전은 결국 그림 없이 글로만 『자산어보』를 완성했다. 1814년의 일이다. 이 책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1977년 수산학자 정문기 박사가 한글로 번역했고, 2011년 김훈 작가가 소설로 썼으며, 최근에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정약전이 책을 쓴 지 200년이 지나서야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셈이다.

자산어보의 서문을 읽어보면 정약전의 태도가 명확히 드러난다. ‘박물博物에 관심 있는 이들이 잘 살펴야 할 점’이라고 했다. 아마도 자신을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뒷사람의 세밀한 연구에 바탕이 되도록’ 했다고 밝혔다. 이건 논문의 마지막 구절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다. 과학 연구의 기본자세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물고기는 ‘함부로 그 이름을 만들어 냈다’고도 했다. 명명創名, 그것 역시 과학의 시작이다.

200년이 지나서야 우리에게 다가 온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조선 시대 선비들이 사서삼경만 외우고 주자만 파지 않았다는 증거라서 더욱 반갑다. 그때라고 왜 자연과학에 관심있는 인물들이 없었을까. 다만 사회 규범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을 뿐이다.

정약전 선생께는 죄송하지만 귀양가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던 연구였다. 하긴 연구자들의 삶이 귀양살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 애벌레의 놀라운 변태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수리멘 곤충의 변태》 (Metamorphosis insectorum Surinamensium) 제9판 ‘석류’ 에 실린 채색 동판화, 1705년.

예를 들어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은 – 본인의 말에 따르면 – 곤충 연구가 너무 재미있어서 친구들도 멀리하고 오로지 벌레와 나비만 관찰했다고 한다. 귀양살이를 자처한 것이다.

마리아는 직업이 두 개였다. 화가이자 곤충학자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우선 자연과학자였고 그토록 뛰어난 그림 솜씨를 연구 기록의 도구로 섰다. 만 13세에 누에가 나방이 되어 날아간다는 말을 처음 듣고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누에를 상자에 넣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69세로 죽을 때까지 그녀의 삶 전체가 되었다. 근 300종이 넘는 나비와 나방, 그리고 다른 곤충의 변태를 모두 직접 관찰하고 글과 그림으로 기록했다.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친 연구 방법론이었다.

마리아는 위의 정약전 선생처럼 정확한 질문을 할 줄 알았다. ‘누에가 뽕잎을 먹고 나방이 되더라. 그럼 다른 벌레도 그럴까? 다른 나비들도 벌레였을까?’ 그래서 다른 애벌레를 잡아다 뽕잎을 먹였다. 굶어 죽었다. 뭐가 잘못되었을까? 다시 야외로 나가 같은 애벌레를 잡아 오되, 이번엔 그 애벌레가 붙어 있던 식물도 함께 가져왔다. 성공했다.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
매우 중요한 발견을 한 것이다. 곤충마다 즐기는 식단이 따로 있다는 사실. 생태학의 시작이었다.

32세에 첫 책을 냈다. 제목이 재미있다. 『애벌레의 놀라운 변태와 그들의 식단』. 수채화 원본을 그리고 동판에 새겨 찍은 다음, 흑백 판화 위에 다시 수채화로 채색하는 작업을 모두 손수했다. 50개의 채색 판화를 묶어 책으로 만들었다. 그림 한 장에 텍스트 한 장으로 구성되었다.

정약전 선생이 아우의 말을 듣지 않고 그림도 남기고 글도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글과 그림 둘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었다.

마리아의 텍스트는 매우 건조하고 객관적이었다. 과학적 서술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다만 서문에 이런 문장이 있다.
‘이 책에서 나의 성과를 보지 말고 오직 신의 영광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 가장 작고 미천한 벌레들의 창조주입니다.’
사람들은 이 문장을 두고 지금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교회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넣었을까? 아니면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까?

 

▮ 종교개혁과 꽃 정물화

마리아가 살았던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였다. 중세였다면 마녀로 몰려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다. 중세에는 자연을 탐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감히 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분석이나 묘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었다. 식물은 오직 성모 마리아나 성인의 상징, 혹은 종교화의 장식으로만 그릴 수 있었다. 식물이나 동물 그 자체를 예술 작품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종교개혁을 통해 달라졌다. 특히 마리아가 태어나고 살았던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 암스테르담은 진보적인 도시였다. 유럽 전역에서 종교 분쟁으로 쫓겨난 상인, 기술자, 예술가, 학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신교 중에서도 마리아가 속했던 칼뱅 교파에서는 신의 피조물을 예술의 소재로 삼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이 무렵부터 정물화로서 꽃 그림이 유행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여전히 걱정이 많았다. ‘꽃이라니, 너무 화려하고 감각적이고 섹시하잖아.’ 하지만 이미 시대는 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서문에 신을 언급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플라톤에 근거한 사고 체계—물과 성은 일치한다. 그리고 모든 만물은 창조주가 만드신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유럽인들의 사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니까 자연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 것이라는 사고는 별것 아닌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이 투영되어 나타나는 것이기에, 즉 창조주의 의도가 들어있는 것이기에 보이는 그대로 탐구하는 것이 곧 과학의 출발이었다.

 

마리안 노스의 《보르네오 사라왁의 석회암 산에서 새로 자란 벌레잡이통풀》 A New Pitcher Plant from the Limestone Mountains of Sarawak, Borneo), 1879

마리안 노스와 생태학적 시야

마리안 노스는 메리안과 또 달랐다. 세밀화가이자 풍경화가였다. 부유한 영국 귀족이었던 그녀는 만 40세에 저택을 팔고 혼자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났다. 미국, 캐나다, 자메이카, 브라질, 보르네오, 스리랑카, 일본, 호주, 뉴질랜드…, 에덴 동산, 낙원을 찾아 헤맸다. 아마도 그녀의 화폭이 낙원이 아니었을까?

마리아와 다른 점은 배경을 함께 그렸다는 것이다. 식물만이 아니라 그 식물이 자라는 환경, 풍경, 때로는 도시와 건축물까지 그렸다. 19세기 중반의 풍경들이었고 이후 많이 변경되거나 훼손되었다. 그녀의 작업은 후에 식물학자들에게 과거 식물 분포와 서식 조건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증거가 되었다. 마리안 노스의 그림은 곧 생태계의 기록이었다. 생태란 생물과 그 환경과의 관계를 살피는 것이니까. 메리안의 곤충과 먹이 식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생태의 시작이었다.

그러니 이 두 여인의 그림을 보면서 조선의 선비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 만약 조선의 선비가 열대에 갔다면

조선 선비들은 산행 후 흔히 ‘유산기遊山記‘를 기록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되,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그 속에서 ‘도의(道義)’를 찾았다. 열대림을 유람한 선비는 이렇게 기록하지 않았을까?

‘번다한 초목이 하늘을 가리니, 이는 천지의 생생지덕生生之德이로다.’ 또는,
‘덩굴과 거목이 서로 얽힌 모습에서 만물의 상생相生을 보았노라.’

거대한 야자수에서 ‘하늘을 향한 곧은 기상’을, 덩굴 식물에서 ‘유연함으로 강함을 이기는 도’를, 열대의 풍요로움에서 ‘천지의 화육지공化育之功’을 음미했을 것이다.

그림은? 한 점도 없이 돌아왔을 수도 있다. 어디를 가나 도의는 상통하는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일필휘지로 야자수를 멋지게 그렸을지도. 혹은 수묵화로 뜻밖의 세밀화가 탄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우리가 가진 장점

조선의 선비와 유럽의 화가, 과학자들은 보는 관점이 상당히 달랐다. 지금 조선의 선비는 가고 없지만, 그들의 사고 체계나 감성, 이념은 우리 속에 내재한다. 거의 유전자 수준이다.

동시에 우리는 학교에서 유럽식 교육을 받았다. 유럽식 사고 체계에 익숙하다. 과학기술에서도 이제 세계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 우리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일 뿐이었다.

이것이 서양인들에 비해 우리가 가진 확실한 장점이다. 우리는 두 세계를 다 이해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밖에 모른다. 동양의 사고 체계로의 접근을 매우 어려워한다. 거기에는 자기들 방식이 제일 우월하다는 자만심이 도사리고 있고, 그로 인해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정원이나 풍경을 보며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는 우리만의 고유한 방식이 있다. 일종의 헬레니즘이랄까. 우리가 그들의 방식을 익혔으나 우리 고유의 것은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척 다행이다.

 

▮ 장소의 혼

함부르크 국제정원박람회 2013 ©고정희

내년 1월 7일부터 식물적용학 시즌4가 시작된다. 영국 정원편이다. 강의를 마친 뒤 여름에 영국 정원 탐방을 떠날 예정이다. 영국 정원의 혼을 찾아가는 여행이 될 것이다. 영국 여행은 상당히 비싸다. 정원 입장권부터 물가, 숙박비까지. 본전을 빼려면 될수록 많은 것을 얻어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사물을 보는 유럽식 시선은 정원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정원박람회에 가면 사람들이 화단 앞에 서서 대화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대개 이렇다. “이 식물 이름이 뭐지?”, “이거 내가 아는 식물인데… 아, 이름이 뭐였지? “, 이거 우리 집에도 있어.” 그리고 아는 식물이면 그 특성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물 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다.

식물적용가들은 더 하다. 그들의 세상은 오로지 식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화단 앞에 바짝 붙어 서서 식물 이름만 묻고 그들의 특성만 논하기에 정원은 너무 복합적인 생명체다.
모든 정원이 장소가 되지는 않는다. 장소가 되려면 혼이 깃들어야 하는데, 그 혼이 그저 깃들지는 않는다. 어떻게? 앞으로 탐구해 나갈 것이다.

정원에 들어섰을 때 사진기부터 들이대지 말고 내면에 뭔가 울리는 것이 있는지 마음의 귀를 열어야 한다. 울림이 있다면 왜 그러한지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그 울림. 공명이라고 해도 좋겠다. 정원과 나 사이의 공명, 이것이 장소의 혼을 읽는 열쇠일 수 있다.

시즌2의 헹크 헤리츤 편에서, 프리오나 정원이 바로 그 울림을 주는 정원이라는 얘기를 했었다. 울림을 주는 정원이 있고 감탄을 자아내는 정원이 있다. 이들은 어떻게 다를까?

어쩌면 여기에 우리 선조들의 방식이 도움을 줄지도 모르겠다.

 


2026년 1월 7일, 식물적용학 시즌4 ‘영국 정원 편’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