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가 없는 것이 오히려 장점일수도

식물적용학 강의를 하다 보니 “정원사” 직업을 가진 분들을 접할 기회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김장훈 정원사일 것이다. 시민정원사들도 많이 만나 보았다. 

사실 한국엔 아직 정원사란 직업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 관심의 대상이 아니거나 전문 지식이 필요하지 않은 직업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엊그제 수강생 한 분이 토로하기를 정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싶어도 아직 제도가 없어 하릴없이 조경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조경기사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했다.

정원사 자격증을 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염려했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오히려 비무장지대의 장점을 잘 이용하면 득이 될 수도 있다 싶었다.  내가 만나 본 시민정원사들은 모두 실력자였고 무엇보다 열정적이었다. 

자격증 제도가 생긴다면 다시 “시험”이 등장하겠고 참고서가 나오고 이를 달달 외워서 필기 시험으로 정원사 자격증을 따야 할 것이다.

현장에서 경험을 쌓고 현장에서 자격증을 딴 시민정원사들, 국가에서 인정하는 제도는 아닐지 모르지만 진정한 정원사들이 아닐까.

국가 기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앞으로도 자유롭게 뜻을 펼치며 그들의 세계를 단단히 다지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분명 조선시대에도 정원을 꾸미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왜 여태 교육제도도 제대로 없고 직업의 호칭도 없지?” 하며 오래 전부터 궁금해 했었다. 2020년 한국조경신문에 “고정희 신잡”을 연재할 때 조선시대 제도에 대해 조사해 볼 계기가 생겼다. 그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그때 썼던 글을 거의 줄이지 않고 다시 실어 본다.

 

고정희 신잡 36회 “그들의 이름”

이름: 마누엘라. 여성. 사십 대 초반. 용모: 다부지고 씩씩함. 직업: 정원사. 근무처: 베를린 녹지국 공원관리과 고용직. 특기 사항: 기록 보유자. 무슨 기록? 베를린 정원사 중 연간 잡초를 가장 많이 뽑아 나른 기록. 손수레로 420개 분량.

이름: 프랑크. 사십 대 남성. 직업: 삼림 마스터. 근무처: 베를린 삼림청 수목 관리팀장. 특기 사항: 나무 백만 그루 이상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음.

베를린 얘기를 또 해야 하나 망설였다. 그런데 베를린 녹지 행정이 공식 출범한 지 올해로 150년째라고 들썩이고 있으니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없다. 코로나가 아니었더라면 여러 가지 기념행사가 열렸을 것이다. 그 대신 토포스에서 베를린 녹지 특집을 내고 녹지환경부에서 8분 51초짜리 비디오 영상을 만들어 발표한 것에 그쳤다.

위에서 소개한 인물들은 바로 그 비디오의 주인공들이다. 지난 150년 베를린 녹지 행정이 얼마나 멋지게 활약했는지에 대한 자화자찬 대신 공원 관리사, 공원 산책의 제왕, 숲관리사 내지는 커뮤니티 정원에서 한 뼘의 텃밭을 가꾸며 행복해하는 할머니와 손자 등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 인상적이다. 현 최고 행정관은 이들을 소개하는 나레이터 역할을 맡아 중간중간에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퇴장한다. 베를린의 녹지는 베를린 <시민들이 스스로 짊어진 책임>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시민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이 아니고 진상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다. 녹지 행정부를 설립한 것도 시민들이었고 녹지 행정을 지금까지 이끌어온 것도 시민들이었다. 시민들이 지켜 낸 40%의 녹지라고 자부심들이 대단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1870년 6월 시의회에서 공원부서의 설립을 결의하고 7월 1일 구스타프 마이어를 초대 부서장으로 임명했다. 구스타프 마이어는 당시 왕실의 정원 총관이었다. 시민대표들이 왕실로부터 정원 총관을 빼앗아 시민공원 책임자로 임명한 것이다. 독일식 무혈혁명의 시작이라 보아도 좋겠다. 그만큼 왕권이 쇠퇴하고 시민계급의 세력이 커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들이 왕으로부터 빼앗은 구스타프 마이어(Gustav Meyer 1816-1877)는 독일 풍경 정원의 마지막 주자로서 베를린 시민공원 제1호, 2호 3호를 차례로 설계한 인물이다. 그가 설계한 트렙토우 공원에는 그의 흉상이 서 있고 포츠담 상수시 정원에는 그가 정원 총관 시절에 거처했던 관사가 아직 남아 있다. 왕실 정원 총관의 지위가 대단했다는 증거다. 정원이 왕권의 상징이 되었던 후기 르네상스 시대부터 프랑스에서 왕실 정원사 제도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최고의 실력자를 전용 정원사로 채용했고 대를 물리기도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프랑스의 앙드레 르노트르가 바로 이런 케이스였다. 독일의 경우 18세기 프로이센에서 본격적으로 왕실 정원사 제도를 도입했다. 말은 왕실 정원사지만 한 사람만 고용한 것이 아니고 많은 인력으로 구성된 행정 부서로서 4층의 위계가 있었다. 부속시설로는 정원사 학교와 식물재배원을 두었다. 총관의 업무 범위는 지금의 정원사와 조경가의 역할을 합친 것과 같았다. 궁전 정원 외에도 전 영토의 녹지계획 수립의 임무가 주어졌다. 총관은 고위관리 중에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정원실습생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다리를 타고 차곡차곡 올라가야 했다. 이렇게 하여 총관이 되면 별장 풍의 관사에서 살았고 하인도 배정받았으며 전용 마차도 있었다. 사후에는 동상도 세워주었다.

이런 얘기를 쓰고 있으면 사실 마음이 별로 편하지 않다. 조선 시대의 정원사는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기 때문이다. 동상, 관사에 전용 마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이름자라도 알려진 정원사가 있었던가? 소쇄원, 독락당 등을 지었던 선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의 뛰어난 관료체계로 미루어 보아 관리로서 녹을 먹으며 궁궐의 정원을 담당했던 직책이 있었을 텐데 그들이 누구였는지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아름다운 창덕궁의 비원은 누가 설계하고 누가 짓고 누가 관리했을까. 문文이 하늘 높이 치켜세워지고 공工과 예藝와 기技를 천시했던 사회였으므로 공과 예와 기가 모두 필요했던 정원예술의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학교에서도 문자만 가르쳤으므로 무와 기와 예는 알아서 배워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료에 더러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을까.

내가 애지중지하는 책이 한 권 있다. 전영옥 저 <조선시대 도시조경론>이다. 혹시 하는 마음에서 이름을 찾기 위해 다시 펼쳐 보았다. 그중 3장 <행정체계>를 보니 조경 관련 사업은 공조에서 총괄했고 업무의 성격에 따라 여러 하위 부서에서 나누어 맡았으며 호조, 예조, 병조에서 지원했다고 한다. 세상을 문관과 무관으로만 분류했던 시대여서 공조工曹가 있었다고 하나 공조판서는 분명 문무관이 맡았을 것이다. 정작 공인들은 하급 관료직이나 얻어 가지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67쪽에 당시 조경 행정 구조에 대한 다이어그램까지 나와 있다. 짐작했던 바와 같이 조경 전담 부서는 없었다. 4장 <인력구성>에서 드디어 몇몇 이름과 만났다.

이름: 박자청. 무관. 태종 조의 감역관으로서 많은 공사를 이끌어 공조판서에 올랐다. 공사 감독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던 듯하다.

이름: 홍계학. 정조대 경모궁 개건 사업에서 5개월 정도 현장 감독(감조관)을 지냈다. 48세에 비로소 진사시에 합격한 문관.

이름: 박봉상. 문관도 무관도 아닌 동산직으로 1771년 궁궐 밖의 수목 관리 및 경기도 일대 외원의 과목과 화초 재배를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동산직은 품계가 없어 잡직에도 못 올라가는 솔속노비로 분류했다. 그래도 급료는 받았다고 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하는 일은 베를린의 수목관리팀장 프랑크와 같았으나 서열로 보면 잡초의 여왕 마누엘라에도 못 미쳤던 것 같다.

문득 동산지기 박봉상 연대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2020년 8월 25일 한국조경신문에 발표)

 

바로크 시대의 동판화가며 출판인이었던 마틴 엥겔브레히트Martin Engelbrecht(1684~1756)의 동판화 “정원사”

© 고정희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