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자,  <아가사 크리스티: 명탐정 포와로>를 보라!

그 중에서 시리스 13, 에피소드 3 <죽은 자의 어리석음Dead Man’s Folly>이 적합해 보인다. 폴리가 거의 핵심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폴리는 정원에 세워 둔 작은 신전 형태의 건축물을 말한다. 특별한 용도 없이 장식용으로 세운 것이다. 풍경화식 정원에서 유래했다. 그저 숲만 있는 것보다 숲속에 작은 신전이 서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특별한 감흥을 받는다. 뭔가 비밀스럽기도 하고 약간은 으시시하기도 하다.

좀 헷갈리긴 한다. 폴리 외에도 보트하우스, 숲속의 별채, 점성술사의 텐트 등이 나오는데 이들은 모두 살인을 저지르고 범죄를 은닉하기 위해  요긴하게 쓰였다. 보트하우스, 숲 속의 별채, 점성술사의 텐트는 본래 용도가 있는 건물이다. 폴리라고 불리는 작은 신전만이 특정한 용도없이 그저 서 있는데, 아마도 그래서 이런 건물들을 폴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용도 없이 그저 서 있는 건물, 쓸 데가 없으니 바보같다고 여겼던 것이겠지. 살인자의 입장에서 보면 바보같기는 커녕 매우 요긴한 물건이다.

번역된 제목이 참 마음에 든다. <죽은 자의 폴리>라고 했다면 별 재미 없었을 텐데 폴리라는 단어의 이중성을 이용해서 <어리석음>이라 한 것은 좋은 결정인 것 같다. 여기서 죽은 자는 주인공 조지 경을 말하는 것같다. 이 사람은 두 번 죽는다. 스토리를 미리 얘기하면 재미없으니 여기까지만.

 크리스티가 1956년에 <죽은 자의 어리석음>을 발표했을 때 평이 그리 좋지 못했다. 사건과 해결방식은 늘 그렇듯 천재적이지만 인물 묘사나 스토리 전개는 너무 평이하다고들 했다. 특히 대사는 거의 재앙수준이었다고. 좀 급하게 썼던 것 같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동네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 비용을 기부하기 위해 썼다는데. 본래 단편으로 내려다가 생각을 바꿔 장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고무줄처럼 질질 늘인 걸지도 모른다. 기본 아이디어는 기가막힌데 이를 갈고 다듬을 시간이 미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목사님이 왜 빨리 안 쓰느냐 재촉했을 수도 있고. 다 내 짐작이다.

반면 드라마는 수작에 속한다. 영상이 가지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눈물나게 아름다운 풍경화식 정원을 자주 보여준다. 우리같은 사람들에겐 눈 호강할 수 있는 좋은 기회. 아가사 크리스티 저택에서 직접 촬영했다고 한다. 봄에 찍었는지 집 채만한 로도덴드론을 실컷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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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사 크리스티의 저택 그린웨이 에스테이트. <죽은 자의 어리석음에서 폴리엣 가문의 저택으로 나온다. 출처: thinking about books

포와로 역을 맡은 배우 데이비드 수셰이,  포와로의 친구이자 유명 추리작가 올리버 여사 역을 맡은 배우 조이 워너메이커 두 배우도 뛰어나다. 특히 올리버 여사의 독특한 의상과 모자 패션은 그저 눈을 즐겁게 한다. 허스키하고 급한 목소리로  뜬금없이 툭툭 내던지는 멘트 역시 국보급이다. 1980년대에는 피터 우스티노프 경이 포와로 역을 도맡아했지만 지금의 포와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내게는 데이비드 수셰이라는 배우의 발견이라고도 볼 수 있다. 처음 포와로 에피소드를 보고 아, 바로 저 사람이다 싶었다. 종종거리는 걸음걸이, 외국인 억양을 모방한 영어 발음과 가끔 문장에 섞어 쓰는 완벽한 불어(내 귀에는 완벽하게 들림), 그리고 나중에 밝혀지지만 악과 범죄에 대한 끝없는 혐오와  그 점에 있어서는 타협을 모르는 완고함. 딱 한 번 타협을 하기는 한다. 그 얘기는 다음에.

다시 <죽은 자의 어리석음>으로 돌아 가 보면, 별로 주목 받지 못하는 등장인물 중에 마이클 웨이멘이라는 젊은 건축가가  있다. 작가는 이 건축가가 아리따운 주인마님 하티와 불륜관계가 아닐까라는 의심을 슬쩍 심어주어 용의선상에 서게 한다. 하티가 곧 실종되자  남편 조지 경이 미쳐 돌아가고 혹시 살해된 것 아니냐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가사 크리스티의 에피소드가 늘 그렇듯 등장인물 들이 죄다 수상쩍은 행동을 한다. 그러니 건축가가 용의선상에 올랐다고 하등 이상할 것 없다.  그런데 이 건축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적 단서를 하나 흘린다. 하긴 모든 등장인물들이 자신도 모르게 단서를 하나 둘씩 흘리긴 한다. 독자나 시청자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포와로만은 이 단서들을 작은 회색 뇌세포little grey cells에 저장했다가 나중에 꺼내서 퍼즐맞추기를 하니 이 역시 이상할 것 없다.

다만  이 건축가가 흘린 단서가 우리에게는 <폴리>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 때문에 주목을 끈다. 나중에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도 결정적 단서가 되지만 그건 포와로의 몫.

마이클 웨이맨은 테니스 코트를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고 왔다. 우연히 포와로와 마주쳐 함께 숲 길을 따라 저택으로 가면서 얘기를 나누던 중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중국식 파고다도 하나 지어달라고 한다. 자수성가해서 부자된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취향이 형편없다. 예를 들어 저 폴리를 봐라. 건물 자체는 근사한데 위치가 전혀 잘 못 되었다. 환한 언덕 위에 서 있어야 효과가 나는 법인데 이렇게 숲 속에 쳐박아 둔거다. 오래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일 년 전에 지은 거다. 굉장히 급하게 서둘러 지었다. 그러느라  기초도 제대로 붓지 않아서, 보라, 벌써 기울고 있지 않은가.>

포와로의 작은 회색 뇌세포가 속삭이는 말: 그래, 왜 그랬을까? 왜 이 근사한 건축물을 숲 속에 숨겼을까? 그리고 왜 일년 전에 그리 급히 서둘러서 지은 걸까?


아가사 크리스티의 에피소드에는 폴리가 자주 등장한다. 작가 자신이 폴리를 좋아했던 듯. 아니면 살인과 관련 된 장소로 적당해서 많이 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거의 말년에 쓴 명작 <끝없는 밤Endless Night>에도 폴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 얘기는 다음에. 얘기가 좀 어두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고정희>

 

에피소드 죽은 자의 어리석음에 등장한 폴리. 오래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세운지 일년도 되지 않는다. 이 폴리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사진은 불법으로 스크린 갭처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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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말라가 La Conception 공원의 폴리. 밝은 언덕 위에 제대로 세웠다. 기초도 튼튼한지 백 년이 넘었는데 기울지도 않고 똑바로 잘 서있다. 사진: jeonghi.go


[본문과의 관계: #47  일 헥타르에 압축된 세계 – 큐가든의 폴리들]

100 장면 비하인드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