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간한 스릴러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다. 1965년 독일 연방 <공간이용의 기본원칙에 관한 법>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얘기다. 조사하는 동안 손에 땀을 쥐었고 <1965년 마침내 공간이용기본원칙에 관한 법이 통과되었다>라는 문장을 만나는 순간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내게 주어진 미션 – 어째서 독일에서는 <자연침해조정제도> 도입 시에 사회적 저항이 없었는가, 산업계와 도시개발 측에서 왜 반대하지 않았는가를 설명해야 했다. 독일인들이 원래 친환경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서라고 막연히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증거가 필요했고 오래 뒤졌고 마침내 찾았다.

1955년 독일연방군이 창설되었다. 2차 대전에서 패망하여 완전 무장해제된 지 십 년만의 일이었다. 이미 1949년부터 군대 창설, 정확히 말하자면 NATO 방위군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연방 의회에서 반대하여 무산되었었다. 2차 대전을 치른 이후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 고로 군대도 싫다.>라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독일의 재무장이 독일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 독일이 무방비상태일 경우 동구권을 향한 유럽 전체의 경계가 허술해 진다.  1950년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독일의 재무장을 먼저 요구하고 나섰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이 독일연방군 창설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다. 한반도 전쟁이 공산권 확산에 대한 우려로 번졌기 때문이다. 미국을 위시하여 서구사회 전체에 <독일도 서방세계의 방어에 참여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유럽의 한 가운데 위치할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동독, 폴랜드, 체코 등 공산권 국가와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더욱 절실했다.결국 연방의회에서도 <유럽군의 일부로서 방위에만 참여한다>는 것을 전제로 동의했다. 그런데 유럽 방위군에 참여하려면 군대가 있어야 한다. 적어도 군인들을 징집해야 했다. 다만 아직 군대에 대한 악몽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던 시기여서 상설 군대보다는 국경수비대로서 <그냥 떠돌아 다니는 군대>를 만드는 방법도 진지하게 고려해 보았다.  1954년 나토 조약 체결에 독일도 참여했으며 이듬해 1955년 연방의회는 6천명을 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방위군 자원제도에 관한 법>을 통과시켰다. 징집이 아니라 자원이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이 군인들은 나치대에 썼던 국방군이란 명칭을 버리고 독일 연방군으로 새로이 불리게 되었다. 나치스와의 연을 끊으려는 의지가 대단했다.

아무리 떠돌아 다닌다 해도 일단 방위군을 모집한 이상(첫 해에 15만명이 자원했다.) 막사도 세워야 하고 훈련할 장소가 필요했다. 어딘가 무기도 넣어 두어야 했다. 즉 군부대를 설치해야 했다. 당시에 독일 연방군과는 별도로 아직 연합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일단 임시로 적당한 곳에 자리잡았지만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주둔군을 위한 공간도 필요했다. 더 큰 문제는 나치스 정권이 폴란드 등 동쪽의 점령지에 강제 이주시켰던 주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었으므로 이들에게 주거지도 마련해 주어야 했다. 다시 말하자면 공간개발의 필요성이 점차 강하게 압박해 오고 있었다.

한편 아직 전후에 파괴된 국토를 재건하는 중이었으므로 어차피 판을 다시 짜야 한다면 잘 짜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더 나아가서 <자연친화적으로 판을 짜야한다>고 주장하는 일련의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현직 의원들이었다. 서로 다른 정당에 속하기는 했지만 이념의 공통분모가 있었기에 함께 모였다. 이들의 이념적 공통분모는 <자연친화적인 경제>를 추구한다는 점이었다. 이 조직의 명칭이 <당을 초월한 워킹그룹 Inter-parlamentary working group> 인데 대개는 줄여서 IPA라고 했다. 1952년에 결성되었으며 2012년에 해체될 때까지 60년 동안 존속했다. 60년동안 표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만 활동했으므로 이 조직의 존재가 전문가들에게 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일종의 비밀결사대였다. 프리메이슨의 냄새도 난다. 표면에 나서지 않은 이유는 정치의 흐름에 휩쓸려  초심을 잃을 것이 우려되어서라고 했다.회원들 명단을 보면 기도 안 막힌다. 역대 총리, 대통령들이 다 이 조직에 속해 있었다. 의회에서는 피터지게 싸우더라도 <국토를 침해로 부터 보호하는 일>에는 뜻이 모아진 것이다. 이들은 독일의 환경정책 정립에 중차대하게 기여했고 수많은 환경법안을 배후에서 사전 작업하여 의회에 밀어 넣었다.

그 법안 중 하나가 <공간이용 기본원칙에 관한 법Raumordnungsgesetz>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후 국토재건의 시기에 난개발을 막기 위해서도 공간이용과 개발에 대한 기본 원칙을 제시하고 서로 코디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전체주의에 두 차례나 혼이 난 뒤였기 때문에 연방 정부에서 총 지휘하는 것을 아무도 반기지 않았다. 중앙정부에 절대 힘을 모아주면 안된다라는 각오가 대단했다. 각 주에서는 우리가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 연방 정부에서 참견하지 말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물론 나치 전체주의의 악몽 외에도 경제부흥에 방해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기도 했다. 라인강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산업계에서는 정부의 간섭없이 온전히 자유롭게 발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바이에른 주의 농부들이 말썽을 부렸다. 군대가 창설되었으니 이제 군부대 설치를 위해 농경지를 빼앗아가는게 아니냐는 낭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청원서가 쇄도하자 <공간이용조정법>이 다시 안건에 붙여졌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부결되었고 그 대신 <연방주 대표위원회>를 설치해서 상호 균형을 맞추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런 식으로 십 년이 흘렀다. IPA에서는 포기하지 않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법안을 다시 제출했고 의회에서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기를 해마다 거듭했다.

그러다가 빌리 브란트가 <루르 지방에 파란 하늘을 되돌려 주자>라는 구호를 들고 나타났고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국민들이 감히 맑은 공기, 맑은 물을 요구하고 나섰다. 1962년 겨울에는 루르지방의 엄청난 스모그가 발생하여 사망 건까지 생겼다. 언론에서 시끄럽게 떠들었고 시민들이 동요했다. 이를 계기로 오토 슈미트라는 친법 의원이 의회에서  <연방정부에서 지휘하고 참견하자는 게 아니라 대중, 즉 국민전체의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니냐>라고 열변을 토했다. 공간이용을 코디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여태 반대했던 의원들도 서서히 설득되어갔다. 특히  <자원과 자연보호는 각 연방주만의 일이 아니다. 국가 전체의 일이다. 그러므로 연방 차원에서의 조절은 불가피하다!>라는 외침에 이의를 달기 어려웠다.

3년을 더 버티다가 결국 1965년 2월 12일에 연방 공간이용기본원칙에 관한 법이 통과되고 <청정한 공기, 깨끗한 물 공급, 자연과 풍경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적 목표로 정의되었다. 이로써 공간계획 차원에서 자연보호와 환경보호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이 독일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위의 사진은 1955년 콘라드 아데나워 대통령이 새로 창설된 연방군을 시찰하는 장면. 출처: Bundesarchiv. Bild 146-2004-0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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