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탕프성에서 매사냥 떠나는 귀족들과 BBC 드라마 The Hollow Crown

8월. 그림만 먼저 완성하고 상부 반원 속 달력은 정작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별자리 – 사자자리와 처녀자리는 그렸지만 날짜가 모두 누락되었다.

성 – 에탕프 Étampes

이번에도 베리 공작과 관련 있는 성을 보여준다. 그림 속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성은 파리 근교의 에탕프 성으로서 1400년에 조카 샤를르 오를레앙 공에게 넘겨준 것이다. 이때 베리 공작은 이미 육순이었다. 1411년 오를레앙 가문과 부르고뉴 가문 사이에 난이 일어났을 때 장 부르고뉴 공작 1세가 이 성을 함락했다. 그림 속의 성이 매우 멀쩡한 상태인 것으로 미루어 이 난이 터지기 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에탕프 성은 서기 1천 년 경에 로베르 2세 왕이 축조한 전형적 중세의 요새였다. 중앙에 클로버 모양의 높은 탑이 있는데 이 탑에 잉게뷔르게 왕비가 1201년부터 1213년까지 갇혀있었다. 왕비가 이곳에 갇히게 된 사연을 보면 사극 드라마감이 되고도 남는다.

문제의 잉게뷔르게 왕비. 출처: Det Kgl. Bibliotek

잉게뷔르게는 덴마크의 공주였다. 1193년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왕과 혼인하여 그의 계비가 되었는데(첫 번째 왕비는 서거) 혼인한 지 석 달 만에 소박을 맞았다. 어쩐 일인지 왕이 왕비의 침소에만 들면 사지가 덜덜 떨리는 이상한 병증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왕은 교황에게 혼인이 무효임을 인가해 달라고 청원했고 교황은 끝까지 거절했다. 왕의 등살을 못 이겨 프랑스 대주교가 교황의 뜻을 어기고 혼인이 무효임을 선언했다. 왕은 왕비를 에탕프 성의 탑에 가두고 이혼을 요구했다. 왕비는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3년 뒤 왕은 아그네스 공주와 다시 혼인하여 두 아이를 낳고 잘 살았다. 그 사이 탑에 갇힌 잉게뷔르게 왕비는 포기하지 않고 교황에게 계속 청원을 넣어 자신이 정비임을 주장했다. 마침내 교황이 중혼이라 꾸짖으며 프랑스를 교회에서 추방하는 저주를 내리겠다고 위협했다. 교회로부터의 추방은 당시 무시무시한 벌이었으므로 결국 왕은 새 왕비 아그네스를 폐위하고 잉게뷔르게 왕비를 다시 맞이했다. 졸지 간에 쫓겨난 아그네스 왕비는 푸아시 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거기서 셋째 아이를 사산하고 세상을 떠났다.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왕은 아그네스 왕비의 사후에도 잉게뷔르게 왕비에게 계속 이혼을 요구하다가 말을 듣지 않자 다시 옥에 가두었다. 정말 끔찍이 싫었던 것 같다. 왕비는 끝까지 이혼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 왕이 1223년에 서거할 때까지 명목상 부부로 지냈으며 후일에도 대비가 되어 자리를 지켰다. 물론 둘 사이에 소생은 없었고 첫째 왕비 소생의 세자가 다음 왕위에 올라 루이 8세가 되었는데 계모가 고생한 것이 안쓰러웠는지 잘 모셨다고 한다.

모두 베리 공작이 태어나기 2백 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고집스러운 잉게뷔르게 왕비가 십여 년 갇혀 있던 에탕프 성은 모두 파괴되고 지금 탑의 잔해만 간신히 남아 있다.

베리 공작

 

Jean Duc de Berry (1340~1416)

장 드 베리(Jean de Valois, duc de Berry 1340-1416)는 프랑스의 왕자였다. 장 2세 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되지 못했다. 샤를5세의 동생, 필리프2세의 형이었다. 만 16세에 오베르뉴, 베리, 푸아투의 영지와 함께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후일 몽팡시에도 그의 영지가 되었다. 만 20세에 영국에 볼모로 갔다가 7년 뒤에 풀려났다.

1380년 형 샤를5세가 서거한 뒤 그의 형과 동생, 앙주공작, 필립공작과 함께 어린 조카 샤를르 5세의 섭정을 맡았다. 이때 장 드 베리 공작은 랑게독의 지휘관이 되었으나 백성들에게 혹독하여 조카의 미움을 샀다. 조카가 성년이 되어 샤를6세로 등극한 뒤 베리공작의 지휘권을 박탈했다. 후일 샤를6세가 정신병에 걸리자 다시 형제들과 함께 섭정하나 큰 권력은 잡지 못한다. 1413년까지 전쟁에 여러 번 참전하고 다시 랑게독의 집정관을 맡았다.

그는 정치적, 군사적 경력을 쌓기보다는 예술과 건축에 관심이 더 많았다. 특히 책을 좋아하여 수많은 필사본을 만들게 했다. 기도서 필사본도 여러권 만들었으나 그중 Très Riches Heures(매우 호화로운 기도서)가 가장 널리 알려졌다. 이 기도서는 베리공작의 소장도서 중에서 가장 중요할 뿐 아니라 프랑스 중세 필사본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1410년 Limburg 화가 삼형제에게 제작을 의뢰했다. 공작은 이 기도서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416년 페스트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Limburg 삼형제도 역병에 걸려 기도서를 완벽하게 끝내지 못한 채 모두 사망했다.

그후 1440년경부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화가가 기도서 제작을 넘겨받아 계속 작업했는데 이 화가가 다름아닌 바르텔레미 데이크Barthélemy d’Eyck라는 주장도 있다. 기도서가 완전히 완성된 것은 1489년으로서 공작의 후손, 사보이 가문의 샤를1세가 장 콜롱브에게 의뢰하여 작업을 마치게 했다. 베리공작이 지은 성과 궁이 도합 17채로 알려졌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많지 않다. 중요한 성은 그의 달력에 모두 묘사되어 있다.

그후 1440년경부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화가가 기도서 제작을 넘겨받아 계속 작업했는데 이 화가가 다름아닌 바르텔레미 데이크Barthélemy d’Eyck라는 주장도 있다. 기도서가 완전히 완성된 것은 1489년으로서 공작의 후손, 사보이 가문의 샤를1세가 장 콜롱브에게 의뢰하여 작업을 마치게 했다. 베리공작이 지은 성과 궁이 도합 17채로 알려졌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많지 않다. 중요한 성은 그의 달력에 모두 묘사되어 있다.

그림 – 귀족들은 매사냥가고 농부들은 멱을 감고

8월엔 귀족들의 매사냥 철인 것 같다.

열 한살의 신부 본 다르마냑. 출처: Raymond Cazelles; Johannes Rathofer 1998; 43

말 세마리에 나눠타고 매사냥 떠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붉은 색으로 고삐를 장식한 잿빛 말에 남녀 한 쌍이 타고 있다. 그 뒤 파란색으로 화려하게 단장한 백마를 타고 역시 파란 의상을 입고 장면을 주도하는 인물은 왕족일 것이다. 제일 뒤에서 갈색말을 타고 젊은 한 쌍이 따르는데 젊은 여인의 연핑크 의상이 돋보인다. 그녀의 파트너는 녹색과 회색을 반씩 세로로 기운 독특한 겉옷을 입고 머리에는 까치둥지를 방불케하는 모자를 썼다. 의상감각이 남다른 둣. 가장 앞에서 몰이꾼이 왼손에 매를 들고 행렬을 인도하는데 오른 손에 들고 있는 기다란 장대로 나중에 나무나 덤불을 두드려서 매를 쫓을 것이다. 귀족들도 저저끔 새를 들고 있는데 모두 맹금류일 것이나 맹금류다운 사나움이 보이지 않는다. 길들여진 탓일까?

1982년에 베리 공작의 기도서를 면밀히 분석하여 책을 낸 생장 부르댕Saint-Jean Bourdin [1]1982: Analyses de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은 이 귀족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백마를 탄 파란 왕족 복색의 인물이 주인공 베리 공작이고 잿빛 말을 탄 앞의 한쌍이 알렝송 공작부부이며 연핑크 의상의 젊은 여인은 베리 공작이 총애했던 손녀딸 본 Bonne d’Armagnac, 그 옆의 남다른 의상감각을 가진 청년이 그녀의 남편 오를레앙 공작 샤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1410년 경에 벌어졌던 장면을 그린 것이 분명해진다. 이 해에 본이 열 한살의 어린 나이로 샤를르에게 시집을 갔다. 4월력에 둘이 약혼하는 장면이 나온다. 열 한살이었다는 말을 듣고 그림을 다시 자세히 보면 정말 어린티가 난다. 남편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있는 것이 첫 사냥길이 불안한 것인지.

5년 뒤에 그 유명한 아쟁쿠르 전투가 벌어지고 남편이 영국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데 미래를 알 턱이 없는 사냥행렬은 평화로워 보인다. 

멱감는 농부들

한 여름에 거추장스럽게 치장을 하고 매사냥을 떠나는 귀족들 뒤에서 시원하게 멱감는 농부들이 보인다. 밀을 수확하던 중 땀을 식히느라 번갈아 물에 뛰어드는 듯하다. 8월은 8월인가 보다. 한 명은 막 물에 들어가는 중이고 두 사람은 한창 수영 중이며 한 명은 다시 뭍으로 올라가고 있다.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 평화로운 장면이다. 이 농부들도 5년 뒤에 아쟁쿠르 전투에 병사로 차출되어 무참히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단 세 시간 만에 영국군의 대승으로 끝난 이 전투에서 선두에 섰던 프랑스 귀족 백 여명이 죽고 수백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수천의 병사들이 학살 당했다고 한다. 

사족 – 아쟁쿠르 전투와 헨리 5세 그리고 세익스피어

한편 영국의 입장에서 보면 헨리 5세가 직접 이끈 아쟁쿠르 전투는 영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헨리 5세를 영국의 위대한 왕의 반열에 들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백년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다. 세익스피어의 소위 말하는 랭커스터 4부작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희곡이 바로 헨리 5세다. 극에서 아쟁쿠르 전투가 클라이맥스를 이루는데 그래서 이 전투가 더욱 유명해 진 것일 수도 있다. 세익스피어의 헨리 5세는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다.

1944년 로렌스 올리비에가 처음 만들었고 1989년 케네스 브래너의 명작이 나왔으며 2019년 더 킹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만들었다.

BBC에서는 2012~2016에 걸쳐 The Hollow Crown이라는 제목으로 세익스피어 랭커스터 4부작을 모두 드라마로 제작했는데 이것이 정말 볼만하다. 대사를 각색하지 않고 명배우들이 원본 대사를 거의 그대로 읊기 때문에 세익스피어의 놀라운 언어를 맛볼 수 있다. 영국 역사나 세익스피어 언어에 관심있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시리즈이다.

참고 자료

  1. Raymond Cazelles; Johannes Rathofer, Das Stundenbuch des Duc de Berry. Les très Riches Heures, Faksimilie Verlag Luzern 1998
  2. Eberhard König: Die Belles Heures des Duc de Berry, Sternstunden der Buchkunst, Faksimilie Verlag Luzern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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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