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춘분. 베를린의 하늘도 평소의 우중충한 표정을 지우고 활짝 웃어 보인다. 문득 얼마 전 다녀온 큐가든Kew Gardens의 수선화 언덕 소식을 전하고 싶어진다.

큐가든의 언덕에서는 겨울꽃과 봄꽃이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워즈워스의 수선화가 언덕을 노랗게 물들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동백이 마지막 포즈를 취한다. 계절은 늘 이렇게 겹겹이 포개진 풍경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 사이에 잠깐 서 보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고별을 준비하는 큐가든의 동백꽃 © 고정희

런던 큐가든 우드랜드 가든에는 언덕 높이 아에올루스 신전이 동그랗게 서 있다. 언덕은 지금 온통 노란 수선화로 수놓였다. 건너편 호수를 바라보는 이 수선화의 물결은, 워즈워스가 ‘황금빛 수선화의 무리a host of golden daffodils를 바라보던 호숫가 언덕을 큐가든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언덕 발치에 워즈워스 시를 새긴 설명판도 있다.

언덕 아래 그늘진 오솔길에서는 동백나무들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짝이는 짙은 녹색 잎 사이로 동백나무Camellia japonica의 진홍빛 겹꽃들이 조용히 피고 지는 중이다. 곧 튤립과 수선화, 목련과 벚꽃이 무대를 차지하면 이 동백들은 조금씩 뒤로 물러날 테지만, 그전까지는 겨울과 봄 사이의 교대를 지휘하는 품위 있는 주연으로 남아 있다.


 

우드랜드 가든의 언덕을 수놓은 수선화 © 고정희

 

: 워즈워드의 시 「I Wandered Lonely as a Cloud」에서 화자는 외롭게 걷다 호숫가 언덕에서 수없이 많은 금빛 수선화를 만나고, 그 풍경이 훗날에도 마음속에서 되살아나 위로와 기쁨을 준다고 말한다.자연주의 정원의 아버지 윌리엄 로빈슨도 이 시를 떠올리며 “나도 이런 수선화 언덕을 만들고 싶다”고 고민했다 하니, 큐가든의 이 풍경은 시와 정원사, 그리고 우리 각자의 기억이 겹쳐지는 하나의 무대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