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노소스 궁전, 프레스코 속의 장미
식물학자들은 식물만 보면 그것이 어떤 종인지 규명하고 싶어 합니다. 실물이 아닌 그림을 보아도 그럽니다. 크레타섬. 크노소스 궁전 벽에 그려진 연분홍의 장미를 처음 보았을 때도 그랬을 것입니다. [아래 첫번째 그림 참조].
보통 사람들은 그림 중앙에 있는 파랑새에 주로 시선이 꽂히지만 식물학자들은 왼쪽 상단 구석에 보이는 한 송이 장미를 보고 흥분했습니다. 문제의 그림은 소위 “블루버드 프레스코화 Blue bird fresco”라고 불리는 것으로 기원전 1550년경에 그려진 것입니다. (홉하우스 여사는 기원전 1450년 전이라고 했는데 최근 연구 결과에서 1550년경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라클리오 고고학 박물관 홈페이지 참조) 바로 이 그림 속의 장미가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 된 장미 그림이라고 합니다. [홉하우스 33쪽 그림 1.10] 이 그림을 보려면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오 (헤라클레이온) 고고학 박물관에 가야 합니다. 그곳 16번 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장미 그림”을 찾으면 헛수고이고 “블루버드” 그림을 찾아야 합니다. (Heraklion Archaeological Museum)
본래는 크노소스 궁전의 소위 말하는 프레스코 하우스 (Hous of Fresco)에 그려져 있었으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모두 떠서 박물관에 가져다 둔 것입니다. 아래 두 그림 중 위의 것은 홉하우스 여사의 책 속에 삽입된 것이고 아래의 그림은 크레타섬의 이라클리오 고고학 박물관 16번 방에서 상시 전시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두 그림의 색상이 왜 그리 차이가 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위의 그림은 마치 신사임당 님의 그림을 보는 듯하네요. 반면 아래 그림은 선명한 색상 덕에 식물을 좀 더 분명히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림 속 장미의 진실은?
1898년부터 크노소스 궁터의 발굴을 시작한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 경 (Sir Arthur Evans 1851-1941) 역시 프레스코화 속의 동물과 식물들을 식별하고자 애썼습니다. 장미, 나리, 아이리스까지는 식별했지만, 정확히 어느 종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희미하게 퇴색하고 부분적으로 훼손된 프레스코화, 그것도 수천 년 전에 그려진 것을 보고 종까지 식별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에반스 경은 화가 에밀 질리에롱을 고용하여 벽화를 복원하게 했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1928년부터 여러 식물학자가 이 벽화 속의 장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장미를 묘사한 최초의 그림이니 흥분할 만도 했죠. 이 장미의 정체 밝히기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원본을 본 것이 아니라 에밀 질리에롱이 복원한 것을 근거로 삼고 식별을 시도한 게 문제였습니다. 전문가들마다 의견이 모두 달라 지금까지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Tucker 2004, pp.733-735 ).
- Rosa canina L. or R. dumetorum Thuil. [Rosa corymbifera Borkh.] (Moebius, M. 1933)
- R. sancta Rich [Rosa x richardii Rehd.] (Hurst, c. C. 1941)
- R. foetida Herrn. (Hutchinson, R. W. 1962)
- R. gallica L. (Hurst, R. 1967)
- a “damascene” rose (Gorer, R. 1970)
- R. gallica x R. phoenicia Boiss (Grimshaw 2002)
- R. persica Michx (Kruessman, G. 1981)
- R. canina (Cameron, M. 1993)
그러니 우리의 홉하우스 여사 역시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이 꽃은 아마도 나일강 상류 지역에서 나는 아비시니아의 장미Rosa abyssinica로 이집트인과의 교역을 통해 미노아에 유입되었을 것이다.” [33쪽 그림 1.10 설명]
그런데 2004년도에 (홉하우스 여사의 책의 초판이 출간된지 12년 뒤) Arthur Tucker라는 식물 학자가 이런 요지의 연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그림이 잘 못 복원되었다. 같은 장미가 왼쪽 아래에도 희미하게 나타나 있는 데 이는 오리지널이다. 옆으로 비스듬히 각도를 잡아 그렸기에 잘 알아보기 힘들다. 에밀 질리에롱은 왼쪽 상단의 장미를 복원하면서 본래 다섯 장짜리 잎을 여섯 장으로 그려버렸다. 이런 오류에 근거하여 장미의 종을 규명하려 했으니 모든 노력이 허사일 수밖에 없다. 실제 크레타 섬에 가서 들에 자라는 장미를 직접 살펴보고 그림과 맞추어 보는 수고를 아무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크레타 섬에서 자라는 야생장미는 Rosa pulverulenta M. Bieb이다. 이 장미는 크레타 중서부의 바위산에서 자란다. 소나무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대에는 꽃의 아름다움보다 바로 이 향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이 장미가 유일하게 부합되는 후보이다.”((Tucker 2004, pp. 733-734))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왜 여태 아무도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옛날 화가들이 크노소스 주변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우선 벽화에 그리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그림이 그려진 구도로 보아 재배되는 식물보다는 풍경의 한 장면을 잡았으므로 Tucker님의 의견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또 누군가 이 이론을 뒤집을 때까지 일단 믿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래 그림과 사진이 Rosa pulverulenta 입니다.


이제 그림 속의 나머지 식물들을 규명할 차례입니다. 파랑새 오른 쪽에 있는 기다란 식물은 그리스 샐비어 (Salvia fruticosa) 라고 합니다. 오늘도 크레타섬은 물론이고 그리스 전체에서 자생하는 허브입니다. 4월 초에 산등성이를 가득 뒤덮는다고 하네요. 그림 가장 하단에 있는 붓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Iris unguicularis ssp. cretensis라고 하여 이 역시 크레타섬 전역에 분포되어있는 꽃입니다.((Tucker 2004, p. 734))


참고 자료
- Tucker, Arthur O., “Identification of the Rose, Sage, Iris, and Lily in the “Blue Bird Fresco” from Knossos, Crete (ca. 1450 B.C.E.)”, Economic Botany 58 (4), 2004, pp. 733–736.
- Lenton, Steve, Iris unguicularis ssp. cretensis, 2015, http://www.cretanflora.com/iris_unguicularis.html
- Ministry of Culture and Sports | Heraklion Archaeological Museum. Online: http://odysseus.culture.gr/h/4/eh430.jsp?obj_id=7921
- http://www.wildfind.com
- http://www.cretanflora.com
© 써드스페이스 블로거진/고정희의 홉하우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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