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의 수채화에서 비롯된 잔디 단상
글: 고 정 희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렸다는 “잔디밭” 수채화 두 점이 전해진다. 그림 크기에 따라 각각 “큰잔디밭”, “작은잔디밭”이라 불린다. 위의 그림은 “큰잔디밭”이다.
그런데 작은잔디밭은 뒤러가 그린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설이 있다. 워낙 뒤러 작품이 많이 모방되었기 때문에 전문가들도 확신하지 못한다. 반면 위의 큰잔디밭은 뒤러가 1503년에 그린 것이 확실한 듯. 그림 크기가 40.8 x 31.5 cm 이니 식물을 거의 실물크기로 그렸다. 오리새 속 그라스 Dactylis가 보이고 민들레, 잎이 넓은 갯질경이, 작은 베로니카, 데이지 등을 알아볼 수 있다.
예술사가들의 용의주도한 분석에 따르면 풀을 하나씩 뽑아서 아틀리에로 가져다가 세밀하게 묘사한 뒤 나중에 화폭에서 조합했을 것이라 한다. 말하자면 풀밭을 ‘디자인’한 것이다.
아틀리에에서 조합한 것이란 증거는 우선 눈높이다. 그림의 눈높이가 매우 낮은데 실제로 풀밭을 이렇게 포착하려면 바닥에 엎드린 상태로 그려야 했을 것이다. 뿌리까지 그린 것으로 보아서도 뽑아서 하나씩 그린 다음에 합성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림의 구도다. 숙련된 예술가의 솜씨로 오른쪽 앞에서 왼쪽 뒤로 시선을 유도하고 전면에 밝고 넓은 잎을 두어 강조했으며 뒤에 그림자처럼 짙은 녹색의 잎으로 명암을 넣어 깊이를 주었다. 실제 이 정도 크기의 풀밭에서는 관찰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그러나 화폭에서는 매우 설득력있다.
그림 제목이 더 흥미롭다. 이 그림은 그 자체로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나중에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식물 스터디였기 때문에 제목이 따로 없었다. 나중에 뒤러가 그린 것이라면 습작에서부터 스케치에 낙서한 것까지 수집 대상이 되었다. 이 풀밭그림은 워낙 출중하니 뒤러의 열혈 팬이었던 황제 루돌프 II세가 수집했는데 그때 기록에 보면 그냥 “풀밭그림”이었다. 그때가 1588년경이었다. 오랜 뒤 18세기 말, 작센 주의 알베르트 공작의 소유로 넘어갔는데 그때도 그냥 풀밭그림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던 것이 20세기에 들어 와, 정확히는 1933년 뒤러의 드로잉 전집이 출판되었는데 그때 “큰잔디밭 Das grosse Rasenstück”으로 제목이 바뀌고 이후 그대로 굳어졌다.

이로써 풀밭에서 잔디밭이 분리되어 나온 것이 18세기 말 이후의 일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영국의 풍경정원과 함께 풀을 짧게 잘라 매끈하게 다듬은 잔디밭lawn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잔디밭은 매우 집중적인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귀족들만이 누렸던 특권이었다. 매끈하게 잘 다듬은 잔디밭은 곧 부와 권력,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었다.
독일에서도 이미 16세기에 잔디밭이라는 말이 있었다고는 하나 영국 귀족들이 말하는 그런 짧게 잘라 잘 다듬은 녹색의 양탄자가 아니라 풀밭을 칭하는 또 다른 용어에 불과했다. 영국에서 건너온 잔디밭이 정원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잔디기계의 발명과 잔디밭 인플레이션
1830년 무렵 잔디깎는 기계가 발명되면서 서서히 중산층에서도 손수건 규모의 잔디밭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것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주택 정원의 상징이 되었다. 오죽했으면 미국인의 잔디밭 집착증에 대한 책이 나왔을까. [1]Jenkins, V. S. (1994). The Lawn: A History of an American Obsession. Smithsonian Books
미국에서만큼 집착 수준은 아니었어도 독일에서도 역시 19세기 말부터 정원에 잔디밭이 들어서고 그때야 비로소 풀밭과 잔디밭이 서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뒤러의 수채화는 누가 보더라도 잔디라기보다는 풀밭이다. 그것을 후일 20세기에 잔디밭이라 칭한 것을 보면 예술사가들이 식물적용 분야에서 상당히 무지했음이 드러난다. 자신들의 분야에서는 토씨하나를 두고 깐깐하게 따지는 사람들이 잔디밭, 풀밭을 뭐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풀밭보다는 잔디밭이 더 있어보이지 않나 그렇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영국과 미국에 비해 독일인의 잔디밭 집착증이 훨씬 덜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오랫동안 잔디를 잘라주지 않아서 풀이 더부록해도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벽하게 다듬은 고운 잔디밭을 일컬을 때는 항상 “영국 잔디”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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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