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 성 희(뉴욕식물원 가드너)
프롤로그
식물원의 봄은 어떻게 오는가. 눈썰미 좋은 정원사에게는 빨갛게 돋아난 풍지초의 새순이나 아기 손처럼 오므린 풍년화 꽃잎을 통해서도 봄이 느껴지겠지만, 대중의 봄은 단연 화사한 꽃잔치가 펼쳐지는 정원에서 시작한다. 백만 송이의 수선화가 드넓은 언덕을 수놓았던 4월의 어느 토요일, 겨우내 적막하던 식물원은 사람들로 붐볐고, 올해들어 처음으로 주차장에는 ‘만차’ 팻말이 세워졌다. 뉴욕식물원의 2022년 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뉴욕식물원 NYBG
뉴욕시 자치구 브롱스의 분주한 도심 한 가운데 오아시스 처럼 펼쳐진 브롱스파크 북쪽에 뉴욕식물원이 자리잡고 있다. 100만 제곱미터(약 30만평)의 면적으로 미국 내 도시 공원 중 최대이고, 남쪽의 브롱스동물원은 런던동물원에 이어 세계 2위의 규모를 자랑한다.
뉴욕식물원의 역사는 18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지질학과 식물학을 가르쳤던 나다니엘 브리튼Nathaniel L. Britton 박사는 선태류를 연구하던 엘리자베스 브리튼과 결혼 후 신혼여행으로 영국의 왕립식물원 큐가든을 방문한다. 식물원의 규모와 연구 환경에 큰 감명을 받은 부부는 뉴욕에도 이런 식물원이 있어야겠다는 비전을 품는다. 부부는 일찍부터 뉴욕시 기반의 토레이식물클럽(현 Torrey Botanical Society)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그 토레이식물클럽에서 식물원 설립을 제안하고, 기금 모금에 착수한다. 앞서 1884년 뉴욕주는 의회의 결의로 현재의 브롱스파크 부지를 수용했고, 7년 후인 1891년, 현재의 부지에 뉴욕식물원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당대의 대재벌 철강왕 카네기, 철도왕 밴더빌트, 금융왕 J.P.모건이 매칭펀드 방식으로 뉴욕시의 출연금에 호응하여 거액을 기부하고 브리튼 박사와 함께 뉴욕식물원의 창립 이사회 멤버가 된다. 현재의 도서관LuEsther T. Mertz Library 건물과 전시 온실 컨서버토리Enid A. Haupt Conservatory는 설립 초기에 지어진 건축물들로, 각각 1900년, 1902년에 건립되어 이후 몇 차례의 리노베이션을 거쳤다.
지난 2016년 뉴욕식물원은 설립 125주년을 맞이하여 향후 5년에 걸쳐 수행할 전략 계획(NYBG/125)을 수립하였다. 정원, 건물 및 설비의 리노베이션, 기금 확충을 통한 재정 건전성 강화, 그리고 방문객의 식물원 경험을 증진하기 위한 다각적인 전략들이 마련되었다. 그 결과 식물원은 작년까지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는 컨서버토리의 주 온실 중 하나인 팜 돔Palm Dome을 개보수, 2015년 15만개의 구근을 시작으로, 수선화 언덕Daffodil Hill에 5년간 백만개를 신규로 식재하는 ‘백만송이 수선화’ 프로젝트, 노후된 트램 7기를 전량 교체하는 사업 등이다. 이밖에 크고 작은 계획들이 대부분 이행되어, 뉴욕식물원은 보유하고 있는 식물 자원의 보존 역량은 물론 연간 백만명 이상의 방문객들에게 수준높은 정원 체험을 제공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올해는 향후 7년간 구성원의 전문성 개발과 조직 내 소통 활성화를 통해 조직 역량을 강화하는 내용의 새로운 전략(NYBG2030)을 발표하고 세부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인종으로 구성된 400여명의 직원들에게 비전을 공유하고 공동체성을 심어주는 일은 대단히 난해한 작업이 아닐 수 없으나, 지난 9월에 새로 임명된 CEO인 제니퍼 번스타인Jennifer Bernstein 원장은 뚝심있게 이 전략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주요 이벤트와 프로그램
트레인쇼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이어지는 초목의 향연이 마무리되고, 부지런한 정원사들이 두툼하게 쌓인 낙엽들마저 말끔하게 긁어 낼 즈음에 식물원은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겨냥한 트레인쇼Holiday Train Show® 준비로 분주하다. 뉴욕식물원의 트레인쇼는 3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 행사 덕분에 적막한 식물원의 겨울은 화사한 조명과 방문객들의 열기로 넘쳐난다. 컨서버토리 내부를 휘감는 약 1km 길이의 미니어처 철로를 중심으로 뉴욕식물원 도서관 건물을 비롯해서 록펠러센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자유의 여신상, 센트럴 파크, 브루클린 다리 등 미국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180여개의 건축물들이 자리를 잡는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미니어처 건축물들이 식물 재료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영상)
열대 난 축제
뉴욕식물원의 열대 난 축제인 오키드쇼The Orchid Show는 봄꽃이 피기 전, 겨우내 추위에 지친 뉴욕 시민들의 꽃 갈증을 해갈하는 오아시스같은 이벤트다. 컨서버토리의 11개 온실 중 선인장으로 가득한 사막 온실 2동을 제외한 공간이 수 천 본의 열대 난으로 가득 채워진다. 세계적인 플라워 디자이너 제프 레이섬과 뉴욕식물원의 오키드 큐레이터 마크 헤처두리안, 그리고 컨서버토리와 놀런 그린하우스 소속 가드너들의 팀웍으로 해마다 마법같은 풍경이 연출된다. 식물들의 증식과 보존을 담당하는 놀런 그린하우스에는 별도의 오키드 컬렉션이 있는데, 이곳에서 보존하고 있는 수천 종의 희귀 난 중에서 오키드쇼에서 전시되는 것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영상)
기획 전시
겨울과 이른 봄에 열리는 트레인쇼와 열대 난 축제가 끝나면 봄부터 가을까지 매년 새로운 주제로 기획 전시가 열린다. 2021년에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일본 아티스트 쿠사마Yayoi Kusama를 초청하여 “KUSAMA: COSMIC NATURE”

올해 식물원은 먹거리를 주제로 한 기획 전시 준비로 분주하다. “Around the Table: Stories of the Foods We Love”
교육 프로그램
뉴욕식물원의 대표적인 교육 프로그램은 부설 기관, The School of Professional Horticulture(SOPH)에서 제공하는 2년제 과정이다. 이 과정은 식물학, 식물생리학, 토양학 등의 필수 이론과 가든 디자인 및 정원 관리 등의 실무 교육, 그리고 인턴 실습이 포함되며, 전일제 집중 코스로 진행된다. 학생들은 뉴욕식물원 원예 부문 산하의 아웃도어가드닝, 식물원운영센터, 컨서버토리, 놀런 그린하우스 등 모든 부서를 돌며 각 2주간의 현장 실습을 경험한다. 매년 15명 내외의 소수 정예로 운영되는 이 과정은 지난 11년간 100%의 취업률을 기록했다. 이외에도 성인들을 위한 1개월간의 전일제 집중 코스로 화훼디자인, 가드닝, 조경디자인 인증 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온라인 및 오프라인으로 분야별 수백의 단과 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뉴욕식물원은 지역의 유치, 초중고, 그리고 대학교 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필드 트립, 각종 캠프, 인턴 실습 등을 위해 개인, 팀, 단체로 식물원을 찾는 학생들로 붐빈다. 특히, 2018년 새롭게 단장한 에더블 아카데미에는 어린이, 가족 단위, 성인 등 전 세대를 대상으로 친환경 먹거리 채소 재배에 관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에더블 아카데미를 찾는 실습생들은 연간 10만 명에 이른다. 이곳의 강의동 건물은 미국그린빌딩 협의회US Green Building Council에서 부여하는 친환경 건물 인증(LEED Gold)을 획득했다. 숲과 습지 등 다양한 생태 환경으로 구성된 어린이 정원Everett Children’s Adventure Garden에서는 동식물들의 다양한 서식 환경과 상호 작용을 관찰할 수 있는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도서관과 디지털 서비스
식물원 설립 초기인1900년에 문을 연 뉴욕식물원의 도서관은 식물원 직원은 물론 방문객들이 이용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 기관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식물학, 원예, 조경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55만 본의 장서 및 자료를 보유하고 있으며, 희귀본, 1850년 이전 자료 컬렉션, 대여용 서적들 및 열람 가능 서적들로 구성된다. 이외에도, 온라인 검색을 통해 고문서, 일러스트레이션, 식물 표본 자료, 종자 및 모종 카탈로그 및 연구 논문 등 각종 디지털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뉴욕식물원의 정원들
정원 구성
뉴욕식물원은 50여 곳의 주제 정원과 수목원 그리고 전시 온실, 컨서버토리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꽃이 아름다운 목본류 정원을 소개하면, 진달래속 정원Maureen K. Chilton Azalea Garden, 라일락 콜렉션Burn Family Lilac Collection, 로즈 가든Peggy Rockefeller Rose Garden 등이 수많은 방문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꽃이 피는 대형 수목 콜렉션으로는 꽃사과길, 벚꽃길, 목련길이 수목원의 봄을 웅장한 스케일로 수놓는다. 단풍나무 콜렉션Judy and Michael Steinhardt Maple Collection 내부에는 목본의 모란과 초본 작약의 교배종, 이토작약 콜렉션이 자리잡고 있다.
침엽수로 구성된 로스 수목원Arthur and Janet Ross Conifer Arboretum 및 베넨슨 침엽수원Benenson Ornamental Conifers, BOC 과 소나무원은 사람이 붐비지 않고 고즈넉한 산책길과 솔향을 즐길 수 있는 추천 코스이다. 목련길 끝에서 시작하는 참나무 콜렉션은 새단장을 마치고 올해 새롭게 문을 열었다. 식물원 중앙에 넓게 자리잡은 테인 패밀리 포레스트Thain Family Forest의 숲길은 뉴욕 남부에서 거의 유일하게 수백년간 개발의 여파를 빗겨난 원시림을 경험할 할 수 있는 곳이다.
암석원은 고산지대, 건조지대, 빙하퇴적지 등 다양한 환경에서 서식하는 숙근초와 교목들이 집약된 명소이고, 자생식물원은 수려한 풍광과 더불어 숲 그늘, 수변 습지, 초원 등 다양한 환경의 북미 자생 식물 콜렉션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숙근초 정원들
컨서버토리 정문에서 왼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컨서버토리 건물을 따라 길게 조성된 숙근초 정원Jane Watson Irwin Perennial Garden으로 들어선다. 이 정원을 구성하는 세 구역 중 처음 방문객을 맞는 것은 가을의 방이다. 1986년부터 이 다년초원을 설계한 린든 밀러Lynden Miller는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정원에서 연출하기가 까다로운 가을 정원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설명한다. 이어서 빨강, 주황, 노랑 등의 밝고 화려한 색상의 숙근초와 관목으로 구성된 따뜻한 방The Hot Room이 나오고 거길 지나면, 청록과 회색, 보라와 자주색이 어우러진 시원한 방The Cool Room으로 접어든다. 이렇든 색채 뿐 아니라 질감과 볼륨의 조화와 변화를 세련되게 구사한 다년초원에서는 숙근초와 일년생 초화들, 그라스류, 그리고 다양한 교목, 관목이 어우러져 사계절에 걸쳐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한다.

©이성희 2021. 9. 28 촬영

©이성희 2021. 12. 8 촬영
2014년 피트 아우돌프가 설계한 숙근초정원Marjorie G. Rosen Seasonal Walk은 컨서버토리와 홈가든센터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좁고 긴 직사각형의 부지에 통로 끝이 막혀 있는 느낌이라서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점은 좀 아쉽지만, 정원 학습자들에게는 아우돌프가 선호하는 식물들의 구성을 관찰할 수 있는 요긴한 정원이다. 6월의 아우돌프 정원은 펜스테몬과 밥티시아, 눈개승마 그리고 셀리눔의 하얀 꽃들로 눈부시게 빛난다. 초여름 부드러운 질감이 두드러지는 쥐꼬리새풀과 조금 더 강한 느낌의 좀새풀그리고 몰리니아 등이 아우돌프가 이 정원을 위해 선택한 선택한 그라스들이다.

©이성희 2022. 6. 8 촬영
아젤리아 가든의 숙근초
뉴욕식물원 숙근초들의 진면목은 앞서 소개한 전형적인 숙근초 정원보다도 진달래속 식물을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는 아젤리아 가든과 자생식물정원 등 식물원 부지 내의 숲 자락 및 그늘 지역에서 감상할 수 있다. 아젤리아 가든에서는 다양한 서식처 환경 속에서 자라는 지피류, 그라스류, 구근류 및 큰 키 식물들이 교목과 관목들 그리고 바위와 어루러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북미 자생종 쥐손이풀속과 다양한 색상과 질감의 사초속 식물들, 그리고 삼지구엽초속 식물들이 피복식물로 활용되었고, 수십 가지 품종의 설강화와 헬레보루스 및 수선화 등 구근식물이 아젤리아 가든의 이른 봄을 깨운다.

©이성희 2022. 5. 24 촬영
특히, 아젤리아 가든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곳에 아담하게 펼쳐진 서밋메도우Summit Meadow에는 미 동부 애팔레치아 산맥의 고지대 초원의 서식처 식생을 옮겨 놓았다. 풍부한 햇빛과 건조한 환경, 그리고 얕은 토양층이 형성하는 스트레스에 적응한 전략식물들 또는 일부 경쟁에 강한 식물들의 군집을 확인할 수 있다.
서밋 메도우에서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그라스와 숙근초를 보면:
- 스코파리움쇠풀(Schizachyrium scoparium)
- 쥐꼬리새풀(Sporobolus heterolepis)
- 좀새풀(Deschampsia cespitosa ‘Pixie Fountain’)
- 꽃그령(Eragrostis spectabilis)
- 세슬레리아(Sesleria autumnalis)
- 유럽사초(Carex divulsa)
- 다양한 부추속 숙근초(Allium ‘Millenium’, A. thunbergii ‘Album’)들이 그라스와 유사한 질감을 보태고
- 미국 동부 자생 국화류(Stokesia laevis ‘Peachies Pick’, Symphyotrichum ericoides, S. oblongifolium ‘October Skies’, S. o. ‘Raydons Favorite’),
- 자생종과 도입종이 혼합된 여러 숙근초들(Gaura lindheimeri ‘Whirling Butterflies’, Gentiana makinoi ‘Marsha’, G. ‘True Blue’, Salvia nutans)이 자라고 있다.

여러 그라스와 숙근초들 속에서 장면을 주도하고 있다.
©이성희 2022. 6. 7 촬영
자생식물원 숙근초
유럽과 아시아 등지에서 온 도입종 숙근초들이 각축을 벌이는 아젤리아 가든과 달리 자생식물원에서는 이름 그대로 미 동부의 토착 숙근초들의 매력을 즐길 수 있다. 숲 지대와 메도우 뿐 아니라 수변 환경 및 암석 지대를 포함하고 있어 다양한 서식 환경에서 살아가는 자생 식물들을 감상할 수 있다.
볼프강 외메와 제임스 반 스웨덴이 설립한 오브이에스(OvS)는 이 정원을 설계하여 2020년 미국조경가협회(ASLA)로부터 일반 조경 부문에서 명예상Honor Award을 수상했다. 이 정원의 시그너처 식물은 수변을 화사하게 감싸는 붉은숫잔대와 모나르다라고 할 수 있다.

모나르다(Monarda didyma ‘Raspberry Wine’, 우)
©Ivo Vermeulen https://www.asla.org/2020awards/153.html
산책로를 따라 좀 더 올라가면 넓게 트인 메도우에서 북미 토착 식물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미국에서 마운틴민트로 불리는 피크난테뭄, 여러 종류의 서양미역취, 등골나물, 하얀 꽃이 아름다운 대극속, 모나르다 등이 중습지 메도우에 어우러져 있다. 더 위로 올라가 산등성이로 시선을 올리면 미국 프레리의 대표 그라스, 스코파리움쇠풀의 매력을 즐길 수 있다.

왼편 산등성이 서식처의 주도종은 스코파리움쇠풀(Schizachyrium scoparium)이다. 그외 피크난테뭄Pycnanthemum curvipes, 서양미역취Solidago spp., 등골나물Eupatorium maculatum, 하얀 꽃이 아름다운 대극속Euphorbia corollata, 모나르다Monarda fistulosa 등이 어우러진다.
©이성희 2021. 9. 30 촬영

거의 모든 초본류가 사그라든 한겨울의 정원을 드라마틱한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이성희 2022. 2. 16 촬영
에필로그
뉴욕식물원의 매력은 여기 소개한 정원들보다도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또는 출입이 제한된 온실 뒷마당, 관리용 도로 주변, 그리고 바위 틈에 있다. 사람이 가꾸지 않는 식물원 부지는 자연이 가꾸게 마련인데, 거기서 숨이 멎는 광경을 자주 목격한다. 절벽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도도하게 자라는 연필향나무Juniperus virginiana나 바위 틈에서 초록 불길처럼 피어나는 고사리Dryopteris affinis, 국화 너서리에 홀로 피어난 캐나다매발톱꽃Aquilegia canadensis은 사람의 디자인이 연출할 수 없는 드라마틱한 감흥을 선사한다. 이른 아침 작업 중 수십 마리의 새에 둘러 싸이거나, 예초기가 아슬아슬하게 피해 간 뱀을 살려 보내며 가슴을 쓸어 내리거나, 얇게 덮힌 눈 위에 찍힌 코요테 발자국을 발견하는 날에는, 이런 경험이야말로 정원사의 특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모든 정원이 그렇듯, 뉴욕식물원은 자연과 문명의 경계에서, 둘 사이의 긴장의 완충지대로서, 화해의 마당으로서, 그리고 더불어 사는 연습을 위한 터전으로서 그 소중한 역할을 감당해 나가고 있다.

이성희는,
뉴욕식물원의 새내기 가드너이다. 2021년 6월에 입사하여 정원운영센터Horticultural Operations Center에서 수목원 및 부지 관리를 담당했다. 주로 아젤리아 가든의 관목과 숙근초를 관리하다가, 최근 가드너로의 승격과 함께 식물 번식과 보존을 담당하는 놀런 그린하우스로 소속을 옮겼다. 입사 전에는 미국 롱아일랜드의 유서깊은 영국 저택 소속 플랜팅필즈수목원Planting Fields Arboretum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다. 프레드릭 옴스테드 2세가 조경을 담당하여 설계한 이 수목원은 옴스테드 200주년을 맞이하여 디자인 원형을 복원하기 위한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인턴 업무의 많은 부분이 이와 관련된 작업들이었다.
한국에서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했고,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까지 SK브로드밴드, CJ그룹, 케이아이엔엑스, 티맥스소프트 등에서 경영기획업무를 담당했다. 2018년 뉴욕주립대SUNY Cobleskill에 편입학하여 Plant Science와 Landscape Development를 전공했다.
북미 자생식물을 중심으로 자연주의 정원디자인을 추구하며, 특히, 뉴욕주 북부의 혹한기를 견딜 수 있는 다양한 정원 식물 발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메일 :slee@nybg.org
페이스북 : facebook.com/onlygrace.lee
© 3.SPACE MAGAZINE / 세계식물원산책 / 뉴욕식물원 / Lee Sung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