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칸 – 야수와 미녀

글: 고정희

바비칸 단지내 스탭형 야생화 화단. 배경의 야수파 콘크리트 건물과 강한 대조를 이룬다. 사진: Nigel Dunnett

부르털리즘 – 야수

1970년대, 1980년대 건축 – 부르털리즘이라고도 하고 야성주의라고도 한다. 야수파는 어떨까. 문자그대로 해석하여 무지막지주의라고도 할 법 하다. 콘크리트를 마음껏 부어 만든 커다란 덩어리들을 아무 장식없이 자신감있게 척척 세웠다. 잿빛 콘크리트의 ‘야성’이 그대로 내비치는 건축 양식이다. 런던의 복합단지 바비칸 Barbican Estate도 그중 하나.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 2천 세대를 짓고 문화예술단지를 함께 지어주었다. 콘서트 홀까지 걸어 가면 된다.

거대한 타워 건물 세채, 옆으로 긴, 높고 낮은 블록 14채를 종횡으로 연결하여 콘크리트 미로와 같은 구조를 얻었다. 주로 1965년에서 1976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중앙에 자리잡은 문화예술단지 바비칸센터에는 극장, 미술관, 콘서트홀이 들어 있고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도 여기서 공연을 한다.

바비칸 센터 앞에서 시작하여 긴 대형 연못이 건물을 가로지르며 건물과 리듬을 주고 받는데 런던에 짧은 여름이 오면 연못가에 야자수 화분을 내다놓고 분수를 마음껏 틀어 남국에 휴가 간 듯 기분을 낸다. 조경이 큼직하다.

바비칸 단지 연못과 테라스. 사진: GreenBlue URBAN
바비칸단지 전경. 부르털리즘의 정수 . 사진: Megalopolisnow

새로운 조경

그 단지의 동남쪽 끝자락에 필로티형 아파트 세채가 ㄷ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모두 1972년에 준공되었으니 근 50년 되었다. 건물로 둘러싸인 중정은 지하주차장 데크 위의 조경공간이다. 기존 조경은 전형적인 ‘공공조경”이었다. 나무 몇 그루, 잔디, 관목 약간, 그리고 철따라 초화류를 내다 심는데도 집중 관리가 필요했다.

2013년 데크층의 방수를 전면 개조해야 했다. 지은 지 40년이 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바비칸단지 배치도. 오른쪽 하단에 오렌지색으로 표시된 곳이 새로운 식재구간

바비칸 운영사 측에서는 새로운 조경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쉐필드 대학 조경학과 나이젤 더넷 교수를 초청했다. 나이젤 더넷은 한 해 전 2012년, 런던올림픽 주경기장 주변에 골드메도우를 가득 심어 일약 유명해진 식재디자이너다.

단지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므로 기존 식재면적의 기본틀은 변형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변화를 추구하려면 식재개념이 전면적으로 달라져야 했다. 사실상 1970년대와 2013년대의 식재개념은 천지차이라 해도 좋겠다. 1993년을 전후하여 소위 말하는 2차 숙근초 혁신 Perennial Perpectives이 일어나 피트 아우돌프, 톰 스튜어트-스미스, 카시안 슈미트, 나이젤 더넷 등, 식재디자인 만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세대가 나타났다. 바로 그점, 식재디자인만으로 큰 명성을 얻는다는 사실 자체도 혁신이다. 각 디자이너마다 독특한 식재기법을 갖추고 있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저관리형의 아름다운, 꽃이 가득 피는 도시 정원”이다. 왜냐하면 도시공간에 그 아름다운 야생숙근초가 여태 진출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높은 관리비용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십 수년에 걸쳐 끈질기게 연구하고 실험한 끝에 “관리가 거의 필요없는” 내지는 “관리가 전혀 필요없는” 식물조합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다. 그들의 최적화를 향한 연구와 실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이젤 더넷 교수 역시 이 흐름에 속하는 디자이너로서 그의 모토는 “High Impact, low Input”이다

스탭에서 온 미녀

나이젤 교수 덕에 지금 잿빛의 건물 사이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야생화들이 피고 진다. 그는 우선 사이트의 빛과 그림자를 분석하고 양지바른 곳에는 스탭기후에서 서식하는 야생화들을 심었다. 스탭의 척박한 극심환경에서 살던 식물은 젇응력이 뛰어나고 강인하다. 그리고 매우 아름답다. 그늘진 곳은 ‘숲자락서식처’로 보고 다간형의 작은 나무를 심어 빛을 최대한 투과시키는 한편 여기도 역시 하부에는 스탭식물을 심었다. 오랜 경험에 의해 그들의 높은 환경적응력을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 있었고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라스 매트릭스

그는 먼저 그라스 3종을 작은 그룹으로 전 식재구간에 고루 배치하여 통일된 배경을 만들었다. 그라스는 가을이 되어야 비로소 진가를 드러내지만 그때까지는 리드미컬한 녹색의 배경을 제공한다.

나이젤 더넷이 적용한 그라스 3종. 왼쪽부터 Sedlseria nitida, Helitotrichon sempervirens, Melica ciliata

봄에는 나무들이 잎을 미처 내보내지 못한 상태라 화단에 빛이 가득하다. 어두운 필로티 내부와는 전혀 대조적이다. 스탭의 봄꽃들이 마음껏 모습을 드러낸다. 빨간 튤립, 연두색의 Euphorbia, 할미꽃, 앵초가 피고 그라스가 녹색양탄자를 부지런히 짜는 중이다.

새로운 봄. 앵초, 할미꽃, Euphorbia와 튤립. 사진: Nigel Dunnett

6월에서 7월 중순까지 색이 서서히 피크를 향해 간다. 니포피아 ‘Tawney King’의 불꽃과 리크니스의 흰꽃이 대조를 이루고 베르베나의 가녀린 꽃대 사이로 멀리 테라코타 빛깔의 톱풀과 선홍의 리크니스가 내다보인다. 진남색의 공절굿대는 점점이 흩어지며 여기저기 엑센트를 주고 다닌다.

한편, 낮게 잘라 준 고광나무가 야생화 사이에 섞여 나도야생화라며 흰 향기를 뿜는다. 그리고 진보라의 살비아 꽃대, 테라코타 톱풀과 함께 색의 삼중주를 연주한다.

늦여름

8월은 꽃이 무더위에 지쳐 물러나고 녹음이 짙어지는 계절이다. 보통은 그렇다. 그러나 나이젤의 스탭풍경에서는 좀 다르다. 이들은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니포피아의 짙은 주홍색이 서서히 노란색으로 변하며 여름이 가고 있음을 알린다. 테라코타톱풀 역시 조금씩 잦아든다. 쑥쑥 올라오는 그라스에게 자리를 내주려는 것이다. 진붉은 크로코스미아와 공절굿대의 짙은 남색의 화음이 아름답다. 한편 베르베나의 보라꽃대는 지칠 줄 모른다. 가녀리다고 무시하지 말라는 것 같기도 하다.

가을

9월이 오고가고 10월이 되었다. 관목잎이 오렌지 색 노란색으로 물들어가며 색을 담당하겠다고 나선다. 봄부터 줄기차게 수고한 야생화들과 번교대하는 셈. 그 사이에서 아네모네 ‘오노린 죠베르’가 꽃의 왈츠 마지막 장을 연주하는 중. 가우라가 화음을 넣고 그라스와 고사리가 베이스음을 넣는다.

나이젤 더넷 교수와 그의 동료 제임스 히치모 교수가 이끄는 쉐필드 대학 식물적용학과는 지금 쉐필트시의 잿빛을 모두 이런 풍경으로 바꿔가고 있는 중이다.

3.SAPCE MAGAZINE / 식물적용학 / 나이젤 더넷 / 야수와 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