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첼시 피직 가든이 들려주는 식물과 제국의 연대기

 

템즈 강변의 작은 정원, 세계 식물사의 교차점


런던의 식물원이라 하면 대개 큐 가든을 떠올린다. 공식 명칭은 ‘영국 왕립식물원 큐가든Royal Botanic Garden, Kew. 오래된 식물원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오래된 식물원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런던의 템즈 강변, 첼시 구의 조용한 주택가를 걷다 보면 문득 나타나는 ‘첼시 피직 가든Chelsea Physic Garden이 사실상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원이다. 1673년에 설립되었다. ‘피직 가든’이라는 말은 의약 식물원을 일컫는 아주 오래된 용어이다. 지금은 아무도 의약 식물원을 피직 가든이라 부르지 않지만, 오래된 명칭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다.

첼시 피직 가든은 약 1.6ha의 작은 식물원이지만 약 5,00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이 장소는 지난 수백 년간 식물과 의학, 대영제국의 식민주의 확장과 노예제, 여성의 소외, 그리고 현대의 기후 위기와 암 치료를 위한 식물 음악 연구, 탈식민주의 논의에 이르기까지 인류사의 수많은 층위가 포개어지고 교차해 온 작은 거인이다.

첼시피직가든. 약용식물화단으로 가는 길. ©고정희

 

권력의 중심에서 의학의 요람으로: 정원의 기원과 제도적 확립


첼시 피직 가든이 들어선 땅은 본래 헨리 8세가 왕실 저택으로 편입해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 엘리자베스 공주 등 왕실 가족들이 머물던 ‘첼시 매너Chelsea Manor’ 영지의 일부였다. 18세기 중반 튜더 스타일의 화려했던 저택은 그사이 부동산 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귀퉁이에 자리 잡았던 작은 정원만큼은 끈질기게 살아남았으니 통쾌한 일이다.

이 정원에 본격적으로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1673년 런던 약제사 길드였다. 그들은 견습생들에게 살아 있는 약용식물을 직접 보여주고 교육할 실습 공간이 필요하다고 여겨 ‘약제사 정원Apothecaries’ Garden’을 조성하고자 했다. 런던 곳곳을 헤매 다니며 가장 적절한 땅을 찾았는데, 지금 자리 잡은 바로 그 장소가 온화하고 영지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까닭에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유리한 미기후microclimate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 높은 담장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

이후 1722년, 이 영지를 매입한 인물은 한스 슬론Sir Hans Sloane이라는 이름의 퇴직 의사였다. 식물 수집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한스 슬론 경은 연 5파운드의 지대만을 받는 조건으로 약제사 길드에게 정원을 영구 임대해 주었다. 그리고 유용한 식물을 잘 재배하고 약제사 교육을 잘하는 장소로 남게 하라는 유지를 남겼다. 이 계약 덕분에 첼시 피직 가든은 오늘날까지 같은 자리에서 기능을 이어오며 지식의 요람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되었다. 놀랍게도 지금까지 슬론 경의 후손에게 이 상징적인 5파운드의 임대료를 내고 있다.

이렇게 훌륭해 보이는 한스 슬론이라는 인물을 뒤집어 보면 컴컴한 속내가 드러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오랜 세월을 식민지 자메이카에서 보냈다. 그곳 총독의 주치의였다. 거기서 코코아 음료를 도입하여 ‘강장제’로 비싸게 팔아 큰돈을 벌었다. 코코아가 기호 음료가 되면서 더 많은 돈을 벌었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자메이카 사탕수수 농장의 상속녀였다. 그렇게 쌓은 부로 첼시의 영지를 사들이고 7만 점이 넘는 방대한 식물 컬렉션과 각종 서적, 필사본, 표본을 수집할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 대대손손 잘살고 있다. 그가 수집한 서적과 필사본은 현재 대영도서관의 핵심 컬렉션을 이루고, 자연사 표본은 런던 자연사 박물관의 기초가 되었다. 최근까지 박애적 수집가로 추앙받았던 슬론 경은 탈식민주의 연구가 활발해지며 비판대에 오르게 되었다.

 

지식의 생산과 제국 네트워크의 허브: 황금기를 이끈 인물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8세기 중엽, 첼시 피직 가든은 수석 정원사 필립 밀러Philip Miller의 부임과 함께 황금기를 맞이한다. 밀러는 전 세계의 식물 애호가들과 씨앗을 교환하며 식물 컬렉션을 폭발적으로 확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또한 원예학의 표준 참고서가 된 <The Gardener’s Dictionary>를 출간하여 첼시 피직 가든의 학문적 위상을 높였다. 더불어 첼시 피직 가든은 대영제국 식물 네트워크의 핵심 허브로 성장했다.

이 시기에 정원은 예술과 지식의 산실로 변모해 갔고 엘리자베스 블랙웰Elizabeth Blackwell이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빚 때문에 투옥된 남편의 옥바라지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첼시 피직 가든의 식물들을 직접 관찰하여 500점이 넘는 세밀화를 그려 <A Curious Herbal>이라는 책으로 묶어서 출판했다. 이 책은 의약 식물의 참고서이자 식물 세밀화의 고전이다.

이후 정원은 조지프 뱅크스Joseph Banks가 아이슬란드에서 현무암을 들여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정원Rock Garden을 조성하는 등 지질과 기후의 실험장으로 발전했으며, 19세기에는 큐레이터였던 로버트 포춘Robert Fortune이 중국의 차나무와 차 제조 기술을 비밀리에 확보해 인드로 넘기는 ‘식물 스파이’ 행위의 출발점이 되는 등 제국주의 식물 프로젝트의 최전선에서 기능했다.

 

정원의 구성과 현대적 변모: ‘인류를 위한 원예’


1983년 독립 공익 재단으로 전환된 이후 첼시 피직 가든은 대중에게 개방되어 도시민을 위한 공공 정원으로도 기능하고 있다. 공간 구성을 보면, 우선 치료 부위와 질병별로 배열된 ‘약용식물 구역’, ‘식용식물·유용 식물 구역’, 약과 독의 경계를 다루는 ‘독성식물 구역’, 그리고 식물 분류사의 야외 교과서인 ‘쌍자엽식물 분류 구역’ 등으로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2023년에는 작곡가 헬렌 아나히타 윌슨Helen Anahita Wilson과 함께 항암 치료에 사용되는 마다가스카르일일초, 영국 주목 등의 미세한 생체 전기적 변동을 사운드스케이프 음악으로 변환하는 ‘리네아 나투랄리스linea naturalis‘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인류를 위한 원예Horticulture for Humanity‘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극복하려 애쓰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도시민에게 심리적·사회적 안식처를 제공한 데 이어 현대적 웰빙과 마음 건강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chelsea physic garden의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한 초등학생들이 휴식을 즐기고 있다. 그런데 한스 슬론 경은 어디를 바라보는 걸까? ©고정희

 

첼시피직가든의 유용식물정원. ©고정희

 

식민지 역사 청산과 탈식민주의 노력


식민주의에 관해 일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위슬리 정원과는 달리, 첼시 피직 가든은 제국주의 식민 역사 극복의 최전선에 서 있다. 노예제도와 깊이 얽혀 있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고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한스 슬론 경이 자메이카 노예제에 기반한 사탕수수 농장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는 사실, 그리고 포춘과 뱅크스 같은 ‘위대한 유럽인 식물 사냥꾼’들의 성취 이면에 수많은 토착민과 현지 농부들의 노동과 지식 약탈이 있었다는 점을 방문객에게 투명하게 알리고 있다.

그에 더 나아가서 유전자원의 공정한 이익 공유를 규정한 ‘나고야 의정서’의 원칙을 지지하며, 새로운 식물을 도입할 때 출처와 소유권을 엄격히 확인하는 등 과거의 식민지적 수집 관행에서 벗어나 현대적 윤리 기준을 실천하는 탈식민주의의 허브로 거듭나고 있다.

 

첼시 피직 가든이 미래를 향해 건네는 말


헨리 8세의 거대한 매너 하우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영지의 한 귀퉁이에서 시작된 작은 약초 정원은 ‘건강에 좋고 유용한 식물을 기르는 곳’이라는 본연의 원칙을 지키며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남았다.

첼시 피직 가든은 약제사의 실습장에서 제국의 실험장으로, 여성 예술가의 작업장에서 차 산업 스파이의 거점으로, 그리고 이제는 기후 변화의 지표이자 팬데믹의 피난처, 식민지 역사 청산의 장소로 끊임없이 자신의 역할을 변모시켜 왔다. 이 정원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식물을 가꾸고 이해하는 행위는 인류가 걸어온 과거를 성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책임을 다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헨리 8세의 별장은 이렇게 동네 담벼락의 안내문 하나로 남았다. ©고정희

 

피처이미지: 첼시피직가든 구 입구와 높은 담장. ©고정희


© 3.SPACE MAGAZINE / 3.URBAN / U2-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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