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 스펀지 3천 헥타르가 탔다
원래는 예고한 대로 베를린 — 빗물의 행선지를 그려라를 소개할 차례다. 그런데 그 보다 급한 일이 생겼다.
벨기에 동부 오트파뉴(Hautes Fagnes)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 소식이 불안하다. 8월 14일 시작된 화재로약 3,000헥타르의 습원·황야·산림 지대가 탔다. 이곳에는 유럽에서도 드문 이탄습지와 융기습원이 포함돼 있다. 대규모의 천연 스펀지라 해도 좋겠다. 그러므로 이 화재로 산림 화재 이상의 생태적 손실이 우려된다.
8월 22일 현재 화재는 전반적으로 통제 단계에 들어섰지만, 일부 구역에서는 잔불을 끄고 재발화를 막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오트파뉴의 화재는 벨기에에서 한 세기 넘게 보기 어려웠던 규모의 대형 자연 화재로 기록될 전망이다.
지금 불이 난 오트파뉴의 융기습원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지형이다. 지금은 연로하신 은사님이 인근에 살기 때문에 여러 번 함께 산책을 갔던 곳이기도 하다. 불길이 은사님 댁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번졌다고 했다. 전화를 드렸더니 은사님은 무사하지만 짐작했던 대로 당신의 안위보다 습원이 타 들어가는 것만 가슴 아파하고 계셨다.
“저게 다시 생기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사진 보관함을 뒤져보니 2017년 5월 18일 벨기에 브라크펜(Brackvenn)에서 찍은 사진이 나왔다. 브라크펜은 오트파뉴의 일부로 독일 국경에 인접해 있다. 검은 구름 아래 끝없이 펼쳐진 습원과, 조류 번식기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현재 화재 피해 권역과 관련 자연보호구역에는 출입 제한이 적용되고 있다.
스스로 부풀어 오른 습원 – 융기습원
오트파뉴는 벨기에와 독일 국경 일대의 고원 지대다. 고도 약 600~700미터에 자리하며 습원, 황야, 산림, 농지와 마을이 이어진다. 이 가운데 벨기에 쪽의 오트파뉴 자연보호구역에는 중요한 이탄습지와 융기습원이 남아 있다.
융기습원(Raised bog, Hochmoor)은 물이끼(Sphagnum spp.)가 만든 이탄층이 아주 오랜 시간 쌓여 주변 지면보다 높아진 습지다. 성숙한 융기습원은 지하수와 광물질 토양의 영향에서 벗어나 거의 전적으로 빗물에 의존한다. 그래서 영양분은 적고 산성은 강하다.
물이끼가 자라고 죽기를 반복하면 완전히 분해되지 않은 유기물이 쌓여 이탄, 즉 피트(peat)가 된다. 이탄층이 두꺼워질수록 식물의 뿌리는 기반의 광물질 토양과 단절된다. 물이끼, 면모풀, 사초류, 끈끈이주걱처럼 극단적인 저영양·산성 환경에 적응한 식물들만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다.
물이끼는 자기 건조중량의 수십 배에 이르는 물을 저장할 수 있다. 표면의 살아 있는 물이끼층과 그 아래의 이탄층은 비를 흡수했다가 천천히 방출한다. 융기습원은 자연이 만든 거대한 스펀지다.
오트파뉴에서는 과거 농업·임업 이용과 이탄 채취를 위해 배수로를 설치하고 주변에 침엽수림을 조성한 곳도 있었다. 이후 이탄습지의 생태적 가치가 알려지면서 채취와 배수의 영향을 줄이고, 훼손지를 다시 적시는 복원 사업이 진행돼 왔다.
이탄층은 막대한 탄소저장고이자 희귀 생태계이며, 물을 저장하고 천천히 방출해 홍수와 가뭄 등 극단적인 일기 현상을 완화하는 기능도 한다. 그래서 유럽 각국에서는 배수로를 막고 습지를 다시 적시는 대규모 복원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스펀지는 빠르게 자라지 않는다. 이탄의 장기 평균 축적 속도는 대체로 연간 약 1밀리미터로 알려졌다. 10센티미터가 쌓이는 데 약 100년, 1미터에는 약 1,000년이 걸릴 수 있다. 화재 뒤 식생이 몇 해 만에 다시 푸르게 보인다고 해서, 습원이 회복됐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이번 화재가 이탄층에 어느 깊이까지, 어느 면적에서 손상을 남겼는지는 완전 진압 뒤 정밀 조사가 필요하다. 다만 토양 속 잔불이 남아 재발화할 위험이 보고되고 있어, 손실이 표면 식생에만 그치지 않을 가능성은 분명하다. 수백 년에서 수천 년 동안 축적된 땅의 시간이 함께 타버리는 격이다.
이탄이 천천히 타거나 그을리는 음연 화재(smouldering peat fire)의 연기에는 미세먼지와 일산화탄소, 다양한 유기화합물이 포함된다. 이런 연기는 눈과 기관지를 자극하며, 천식·호흡기 질환 또는 심혈관 질환이 있는 사람에게 특히 위험할 수 있다. 이번 화재에서도 국경 인근 독일 몬샤우 일대에는 강한 연기가 퍼져 주민 일부가 대피했다.

융기습원 형성 과정. 소스 그래픽: Elke Freese/Wikimedia Commons
물을 품은 습원이 왜 불탔을까?
불을 붙인 손이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모르는 사이 오랫동안 오트파뉴를 태울 준비를 한 것과 다름이 없다. 습지에서 물을 빼냈고, 그 자리에 나무를 심었으며, 이탄을 연료와 상품으로 바꾸었다. 그러고는 마른 이탄이 불길을 먹어 치우는 모습을 이제 재난이라 부른다.
작은 불씨가 광범위한 생태 재난으로 확산할 수 있었던 조건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트파뉴의 이탄지에는 과거 이용 과정에서 설치된 배수로가 남아 있고, 일부 구역은 오랫동안 건조화의 영향을 받아왔다. 화재 직전인 2026년 8월 중순에도 건조하고 맑고 더운 날씨가 이어졌다.
습지가 마르면 물이끼가 약해지고 몰리니아(Molinia caerulea) 같은 키 큰 벼과식물이 퍼지기 쉽다. 건조한 몰리니아 초지와 침엽수림은 불길이 이동할 연료가 될 수 있다. 마른 이탄 자체도 연료가 된다.
기후변화가 이 불에 직접 성냥을 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장기 배수로 취약해진 이탄층, 건조한 식생, 고온과 강수 부족은 작은 불씨가 더 멀리 번지고, 더 깊이 파고들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사실 이곳에서는 수십 년 동안 습원을 다시 적시는 복원 사업이 진행돼 왔다. 그러나 복원이 완결되기 전, 여전히 건조화의 흔적을 안고 있던 광대한 구역이 화재를 불길을 만난 것이다.
불꽃이 땅속으로 들어가 좀비가 되어 다시 나타난다
마른 이탄은 그 자체가 연료다. 실제로 20세기 중반까지 이 지역에서는 이탄을 채취하여 말려 연료로 섰다. 불은 이탄층으로 파고들어 적은 산소 속에서도 서서히 타며 이동할 수 있다. 바로 지금 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겉불이 꺼진 뒤에도 땅속은 계속 그을리고, 며칠 또는 몇 주 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다시 불길이나 연기가 나타날 수 있다. 이른바 ‘좀비 화재’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이런 음연 화재는 진화가 어렵다. 지표에 물을 뿌리는 것만으로는 이탄층까지 충분히 적시기 어렵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화재 위험을 낮추려면 습지의 수위를 회복하고, 이탄이 다시 마르지 않도록 만드는 일이다.
화재 뒤에는 남는 토양은 구조가 복잡해진다. 지표 식생만 탄 곳, 상부 이탄까지 탄 곳, 깊은 이탄이 소실된 곳, 젖은 물이끼가 살아남은 곳이 모자이크처럼 뒤섞일 수 있다. 면밀한 조사와 분석이 따라야 한다.
지표만 탄 곳에서는 살아남은 뿌리와 종자에서 식생이 비교적 빨리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상부 이탄이 타면 탄화된 이탄과 재, 노출된 검은 토탄이 남는다. 심하게 손상된 곳에서는 지표가 내려앉고 하부 이탄이나 오래된 퇴적층이 드러날 수도 있다.
재에는 칼륨·칼슘·인 등의 무기질이 농축될 수 있다. 그래서 본래 산성이 강하고 영양분이 부족한 융기습원의 표면이 일시적으로 부영양화될 수 있다. 그렇다고 좋은 일이 아니다. 물이끼와 희귀 습원식물보다 불에 강하고 성장력이 빠른 몰리니아가 먼저 번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급한 문제는 침식이다. 식생이 사라져 노출된 이탄은 햇볕과 바람에 말라 부스러지고, 폭우가 오면 물에 씻겨 내려갈 수 있다. 불이 직접 태우지 않은 이탄까지 화재 뒤의 비바람으로 잃을 수 있다.
복원의 첫 계명은 물
검게 탄 땅을 보면 마음이 급해져 무엇을 심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융기습원 복원에서 첫 번째 질문은 식물이 아니라 물이다.
완전 진압 뒤에는 이탄이 탄 깊이, 잔존 이탄층, 수위, 배수로, 살아남은 물이끼 군락, 침식 위험 지역을 정밀하게 조사해야 한다. 그다음 옛 배수로와 도랑을 막아 빗물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낮은 둑을 설치하고 깊게 팬 물길을 메워 수위를 지표 가까이 끌어올리는 방식이 필요하다.
검게 노출된 이탄은 현지 식물 잔해나 적절한 멀칭재로 덮어 바람과 물에 씻겨 나가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출입도 장기간 제한해야 한다. 일반 산불 복구처럼 비료를 뿌리거나 외래 목초 종자를 대량 파종해서는 안 된다. 융기습원은 영양분이 부족해야 유지되는 생태계이기 때문이다.
물이 돌아와도 물이끼가 모두 사라진 곳에서는 자연회복이 더딜 수 있다. 이때는 살아남은 인근 군락에서 최소한의 물이끼 조각을 옮기고, 표면의 습도를 유지해 물이끼층이 다시 형성되도록 도울 수 있다. 면모풀(Eriophorum spp.)과 사초류(Carex spp.) 같은 자생 선구식물도 노출된 이탄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가문비나무를 다시 심어서는 안 된다. 융기습원의 중심부에 큰 나무가 자란다는 것은 그곳이 이미 말라가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식생은 2~5년 안에 다시 푸르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습원의 회복이라 부를 수는 없다. 물이끼 군락과 생태계 구조가 돌아오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리고, 불타 없어진 이탄층이 다시 쌓이려면 수백 년에서 수천 년이 필요하다.
융기습원에서 한국의 정원까지
우리는 오트파뉴의 화재를 안타까워하면서도 다른 나라의 습원에서 채취한 이탄을 원예용 상토에 섞어 사용한다. 한국에서 ‘피트모스’라 부르는 재료다.
피트는 가볍고 물을 잘 저장하며 통기성이 좋아 육묘와 분화용 상토의 핵심 원료로 쓰인다. 그러나 피트모스는 빠르게 재생되는 이끼를 거두어 만든 재료가 아니다. 습원의 물을 빼고 표면을 말린 뒤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쌓인 이탄을 기계로 채취한 것이다.
한국은 이탄을 상당량 수입하며, 주요 수입 상대국에는 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 같은 발트 국가들이 포함된다. 유럽 전역에서 피트 채취가 금지된 것은 아니다. 벨기에와 독일의 융기습원의 상당 부분은 보호받고 있지만, 발트 3국과 캐나다 등에서는 허가된 구역을 중심으로 상업적 채취가 이어지고 있다.
합법적으로 거래된다고 해서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것은 아니다. 채취가 끝난 습원에 물을 되돌리고 물이끼를 다시 자라게 할 수는 있어도, 사라진 이탄층의 시간까지 복원할 수는 없다.
한쪽에서는 융기습원을 되살리기 위해 배수로를 막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천 년 된 습원을 파내 화분에 담는다. 스펀지 도시를 말하려면 도시의 빗물뿐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토양 재료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물어야 한다. 이제는 우리 나라 남의 나라를 구분할 때가 아니다.
오트파뉴의 화재는 도시 밖에서 일어난 예외적인 자연재해가 아니다. 물을 가능한 한 빨리 빼내는 방식으로 땅을 다루어온 시대가 어디에 도달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스펀지 도시는 배수의 시대에서 저류의 시대로, 물을 몰아내는 토양에서 물을 품는 토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뜻이다.
오트파뉴의 검게 탄 이탄층과 그 안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잔불은 그 전환을 더는 미룰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국내 보도 현황
한겨레: 사흘 째 불타는 벨기에 최악의 산불
연합 뉴스: 그리스와 벨기에 화재 소식
사진 보도: ⇒
2. 베를린 — 빗물의 행선지를 그려라
3. 파리 — 탈포장 뒤의 토양 이용을 설계하라
4. 코펜하겐 — 범람을 설계하라
5. 빈 — 생태기능을 발주 언어로 바꿔라